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서술자는 말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말하는 이유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요즘 핫한!) 비비언 고닉의 글쓰기 책 - 에세이와 회고록, 자전적 글쓰기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책 뒤표지에 적혀 있는 '글쓰기와 글 읽기, 자아 탐구 또는 자기 폭로에 대한 정직한 통찰'이라는 문장이 이 책을 잘 소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쓰는 대부분의 글은 '억울한 나'를 토로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상하게도 이런 글은 쓰면 쓸수록 나는 잘못이 없는데 왜 세상은 나에게 이러저러한 것들을 강요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을 쓰고 나서 다시 읽어본다.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뒤집어쓴 채 귀를 틀어막고 나만 옳다고 외치기만 하고 있다. 지우고 다시 글쓰기를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자기 검열이 시작된다. 2023년의 대한민국에서, 4인 가족 제도에 속해 있는 이성애 가정주부 여성으로서 내가 가진 권력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내면화하고 휘두르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 얼마나 죄책감을 느끼며 노력하고 있는지 말이다.
억울함에 치우치면 신세한탄이 되고 -응, 한바탕 털어놨으니 내 자리로 돌아가자.
죄책감에 치우치면 모든 게 내 잘못이 된다.- 내가 선택했으니까 내가 책임지고 감당해야지.
나의 글은 감정에 빠진 채 허우적거리는 나와 그런 나를 검열하는 시선 속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나를 적당히 버무려 낸, 그중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그런 나에게 비비언 고닉은 말한다. '페르소나'가 필요하다고.
문제는 거리 두기가 아니라, 누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나는 결코 이야기를 가지지 못했다. 이집트 여행 후 십수 년이 지나, 어머니와 나, 그리고 어렸을 적 우리 옆집에 살았던 어떤 여자에 관한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으로 나는 상황에서 이야기를 떼어내려 애썼다. 이때 비로소 페르소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또한 상황과 이야기, 페르소나, 이 모든 것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내 이야기하는 게 뭐 어때서? 그건 내 자유잖아? 왜 내 이야기인데 내가 감정적으로 깊이 빠져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결국 이야기라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을 언어화해서 글로 써내면 더 이상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식으로든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글'이라는 형태로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게 된다면, 거기서의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나와 같지만 다른 '페르소나'이다. (나는 이렇게 이해를 했다)
따라서 에세이와 회고록에서 서술자가 위치해야 하는 지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고닉에 따르면 작가는 서술자가 아니며, 작가이지만 작가는 아닌 페르소나를 가져야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이야기가 숨통을 열고 스스로 나아가게 하려면 이 사람들과 사건들에서 멀찍이 물러나야 한다는 걸 알았다. 간단히 말해, 내 이야기에 더 자유로운 연상을 허용해 줄 유용한 관점이 필요했다. 내가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놓쳤던 점은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서술자에게서만 이런 관점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닉은 말한다. 글을 읽을 때, "그래서, 당신 이야기가 뭔가요?"라고 질문하라고. 그 글이 글쓴이의 신세한탄으로 끝난다면, 그건 왜 그런가? 글쓴이는 왜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는가? 질문하라고. 글쓴이가 '진짜'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를 찾아내는 것, 그게 '내적 맥락'을 찾는 법이고 글을 쓸 때 나의 글과 거리를 두는 서술자(페르소나)를 찾는 법이기도 하다.
"아니, 아니요. 무엇에 관한 이야기냐니까요?"라고 다시 물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학생들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읽게 되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까, 내적 맥락을 찾는 것이다. 내적 맥락은 글을 현재 상황 너머로 확장해 주고,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밝혀주며, 형태를 부여하고 내밀한 목적을 그려내 준다.
그저 나 자신을 꺼내놓는 글, 그 상황에 그저 나를 '위치'시켜 놓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켜보고 서술해 나가는 글을 쓰고 싶다면 참고해 볼 만한 책이다. 하지만 읽어도 잘 모르겠는 건... 나뿐이겠지? 다들 꼭 읽어보라고 해서 좀 쉬울 줄 알았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추천만 하지 말고 왜 추천하는지 설명을 해줘요.... 고닉이 예로 들고 있는 작품들도 다 첨 보는 소설들이었다. (뒤라스의 <연인> 정도만 알고 있는데 이것도 내가 알고 있는 작품이 나오다니!!! 하면서 반가웠음) ”이렇게 하면 글 잘 쓸 수 있어요!" 같은 어조가 아니라 작품을 예로 들어서 '내적 맥락'을 찾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글이 우리 마음에 와닿는 것은, 글을 읽는 시점에 필요한 우리 자신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얼마나 자명한 원리인가! 사랑이나 정치 혹은 우정에서도 그렇듯,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냐가 제일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