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 클레어, <망명과 자긍심>
망명, 그리고 자긍심. 서로 관계가 없을 법한 단어들이다. 그리고 그 아래 붙어있는 부제인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을 보자. 낯선 단어들이 가득하다. 교차, 퀴어, 장애, 정치학? 이 모든 것들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걸까? 어떻게 서로 부딪히고 연결되고 확장되어 갈 수 있을까?
일라이 클레어는 2판 서문 중 반전시위에서 본 플래카드 문구를 소개한다. "'눈에는 눈'은 전 세계를 눈멀게 만들 것이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비유이며, 한눈에 들어오는 캐치프레이즈인 이 문구에 대해 "이는 장애를 은유로 바꿔버리고, 장애란 망가졌다는 뜻이고 본질적으로 달갑지 않은 것이라는 인식을 강화하며, 전쟁과 연관된 수많은 장애 경험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슬로건 중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이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다시 들여다보면, 정말 어마어마한 차별의 언어들이 쏟아진다.
1장에서는 ‘산'이 등장한다. 일라이 클레어는 산을 오르는(혹은 오르려고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과 '슈퍼 장애인 현상'에 관해 다룬다. 우리가 '대단'하다고 '정신력'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저 사람들에 비해 우리는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감사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들... ’건강한 몸’이 최고라는,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들은 '정상적인 몸과 생활'을 공고하게 만든다.
다시 생각해 보면, 슈퍼 장애인들은 노력을 해서든, 의학이나 기계의 도움을 받든 '일상'을 살아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니까, 장애인은 '극복'의 아이콘 아니면 '함께 살 수 없는(또는 우리와 분리된)' 존재로 나눠진다.
작가는 '시스키유 국유림'에서 나고 자랐다. 오래된 열대우림, 숲이 우거진 곳인 작가의 고향마을은, 나무를 베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이기도 했다. 그가 묘사하는 숲은 정말 매력적이었고, 수백 년 된 나무들이 벌목된 그 장소들은, 작가가 객관적 거리를 두고 서술하는 만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어릴 때 내가 배웠던 서구 세계 백인의 시각에서는 나무, 물고기, 물은 재생 가능한 자원이었다. 50년 전만 해도 그것들은 끝없는 자원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백인들이 서부 '개척지'에 가져왔던 신화였다. (중략)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공립학교, 정부, 산업의 실세들은 우리에게 나무와 물고기는 무한하다기보다는 재생 가능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만약 개벌지에 부지런히 다시 나무를 심는다면, 나무, 종이, 목재는 결코 바닥나지 않을 것이다.
일라이 클레어는 벌목과 개간사업이 환경파괴와 산림개발이라는 현상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세계화와 환경에 대한 뿌리 깊은 생각들을 건드린다. 이 의문들은 장애와 퀴어 정체성을 가진 '일라이 클레어'라는 자신의 위치와 교차되면서 '산'과 '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이자 가장 탐욕스럽게 자원을 취하는 국가의 시민으로서, 지속 가능한 산출량의 의미에 대해 잊고 살던 소비자로서, 지금 우리는 우리가 지구 및 그 자원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가? 우리는 나무, 물고기, 물, 땅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고 있는가? 환경을 희생시켜 수익을 내는 걸 당연시하는 우리의 전제를 바꿔나갈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낡은 신념 체계 때문에 사람과 마을들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2장 '몸'에서 일라이 클레어는 자신에게 이름 붙은 단어들-핸디캡, 장애인, 불구자, 절름발이, 지진아, 퀴어, 프릭-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중 자신이 다른 단어들은 (어느 정도) 받아들이면서 '프릭'이라는 단어에서 왜 걸려 넘어지는지를 상세하게 파고든다.
그는 '프릭 쇼'를 주목한다. 프릭 쇼는 1800년대 중반에서 1900년대 중반 사이 유행했던 오락거리이자 산업이기도 하다. 장애를 가졌거나 식민지에서 팔려온 프릭들은 진짜 자신의 삶의 맥락은 지워진 채, 사람들이 마음껏 비정상을 관음 할 수 있는 존재들로 전시되었다. "그들을 프릭으로 만든 건 바로 프릭 쇼였다. 프릭 쇼는 신중하게 '정상'과 타자 사이의 차이를 과장하여 구성했고, 그 구분은 기꺼이 많은 돈을 지불하고 구경하는 시골뜨기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장애인으로 사회에서 명명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오히려 직업을 잃기도 했다는 사실 역시 지적한다. 사회는 '비정상'이라는 범주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장애'라는 이름을 붙이고, '일할 능력 없음'이라는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다.
자긍심은 내면화된 억압에 직접적으로 맞선다. 내면화된 억압은 수치심, 부정, 자기혐오, 두려움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 자긍심은 분노, 힘, 기쁨을 북돋는다. 자기혐오를 자긍심으로 바꾸는 일은 근본적인 저항 행위다. 많은 공동체에서 언어는 이러한 변환을 위한 무대 중 하나가 된다. 때로 혐오와 폭력의 말들은 중화되거나, 심지어 자긍심의 말로 변환될 수 있다. 불구자라고 지껄이는 왕따 가해자들, 퀴어란 말을 야구방망이처럼 휘두르는 혐오자들은 똑바로 노려보면서, "그래, 네 말이 맞아. 나 퀴어야. 나 불구야. 그래서 뭐?"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죽길 원하는 자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행동이다.
일라이 클레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긍심'을 말하려고 애쓴다. 물론 이건 쉬운 일은 아니다. 어디서 자긍심을 찾을 것인가? 장애를 가진 신체를 전시해서 동정을 얻으면서? (여기서 작가는 프릭 쇼가 아직 사라진 게 아니라는 의구심을 던진다) 비장애인들과 같은 일상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서?
일라이 클레어는 응시를 돌려주는 행위를 꼽는다. (뇌 병변으로 몸을 흔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비장애인들의 시선을 그대로 다시 응시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요컨대 치료되어야 하는 것은 비장애 중심주의이지 우리의 몸이 아니다. 우리는 의료적 치료보다는 시민권, 동등한 접근,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 독립적으로 살아갈 기회, 장애인을 존중해 주는 양질의 보건 의료, 차별이 철폐된 교육을 원한다. 우리는 세계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지, 고립되고 기피되기를 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