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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Apr 10. 2024

마리의 얼굴들

전혜진, <마리 이야기: 1932-1933 기이한 시대를 산 여섯 여자>

"우리 아버지도, 마을에 들어온 목사 딸과 결혼했다. 그런 걸 결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세상에서야 혁명가니, 사상 운동가니, 평등이니 해방이니 말하지만, 그 사람들이 말하는 평등이며 해방이며 조국의 앞날에, 과연 계집아이들이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너 보기는 어떻더냐."




1920-30년대 경성은 나에게 기이한 시대라기보다는 매력적인 시대였다. 서양식 문화와 물건들이 들어오고, 신여성과 모던뽀이,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뒤섞인 역동적인 시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누구의 시선'에서 매력적인 시대였을까. 같은 시대라도 어떤 인물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시대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작가는 '마리'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들의 눈으로 이 시대를 새롭게 바라본다. '마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은 원래부터 마리였기도 하고, 리후이로 살고 싶지 않아 마리로 살기도 하고, 윤옥이에서 윤마리가 되기도 한다. 


여섯 편의 소설의 시대는 비슷하지만, 장소는 각각 다르다. 경성, 상해, 동경, 만주, 포와(하와이), 호령(충청도와 경상도를 아우르는 곳). 그리고 마리의 국적도 다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왕족, 그것도 몰락한' 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동경기담>에서는 이미 몰락한 조선의 '이름뿐인' 왕자 이우 공은 사와코 여왕과의 혼사를 마다하고 조선의 약혼녀(박찬주)와의 결혼을 고집한다. 


이왕가는 조선 반도의 구왕실이었다. 오백 년을 이어 간 번듯한 나라였다고는 하나, 지금도 그런 것은 아니지. 게다가 이우 공은, 하다못해 그 망한 나라의 황태자조차도 아니다. (중략) 하지만 황실에서는 그런 조선 이왕가 사람들을 부지런히 황실의 여왕들과 혼인시켰다.


여기서 등장하는 이우 공과 박찬주의 혼인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다. 이처럼 각 작품에는 실제 존재했던 인물들인 유관순, 이봉창, 이승만 등이 나오면서 당시 역사와 비교해보며 읽을 수 있다. 


또 기억에 남았던 인물은 <만주 기담>에서의 '요시코'다. 요시코는 청나라의 공주지만, 일본에서 자랐다. 


요시코는 달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했다. 청나라 황족인 숙친왕의 딸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친구이자 청나라 황실 재건을 돕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가와시마 나니와의 양녀가 되어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갔던 것, 그곳에서 양어머니의 구박을 받았던 일들을. 자신을 청 황실의 후예라고 생각하지만,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렇다고 일본인이 될 수도 없었다는 이야기까지 전부 다. 


요시코는 여전히 자신이 '청나라의 공주'임을 믿고 있고, 만주 땅에 청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일본인들의 말을 믿고 있다. 그런 요시코를 지켜보는 마리는 '자신을 구해 준 사랑하는 사람' 과 '청 제국을 되살리기 위해 중국을 일본에 넘길 수도 있는 매국노' 사이에서 갈등한다. 어쩌면 한 사람을 '~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게 불가능한 건 아닐까. 나 자신에게도 여러 얼굴이 있듯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제까지 1920-1930년대를 '독립'이라는 키워드 하나로만 바라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일을 한 전적 때문에 이 시대에 우리에게 남은 '흠없는' 시인은 몇 남아 있지 않다. 윤동주 정도? 결국 빨리 죽어야 오래 기억되는 아이러니라니. 하지만 당시 일본과 중국, 만주, 북간도는 생각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서로 생각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사실 대학때 1920년대를 사랑했던 한 사람으로서 맘껏 이 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비록 그 때는 이광수와 염상섭, 이상, 박태원, 백석... 당시 '나라를 잃었고, 일본에서 배우고 돌아왔지만 무기력한 지식인'들의 눈으로만 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쓰면서도 정말... 남성작가 이름들은 줄줄 나오는데... 나혜석과 김경애를 졸업할 때 쯤 알았나.



처음 인용한 대사를 2023년 버전으로 바꾼다면 어떨까.


"그 사람들이 말하는 국민이며 자유며 경제 성장에 과연 여성, 장애인, 퀴어, 노인, 소수자가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너 보기는 어떻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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