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기회란 불특정 한 시기에 도둑처럼 방문하기에 기회를 잡을 수도 있고 놓칠 수도 있다. 반면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적용되는 중요한 시기도 존재하는데, 그중에 한 시기가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이 아닐까.
중학교에서 공부에 소홀했던 아이도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열심히 공부하고자 의지를 다지고, 부모 또한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자식의 미래를 고민하며 마음을 다잡는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그만큼 인생에 있어 결코 소홀히 보낼 수 없는 중요한 시기가 바로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이다.
중 3 겨울 방학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성호는 공부 대신 게임을 선택했다. 겨울 내내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더 집중해서 게임을 했다. 중 2부터 시작한 <워크래프트3> 게임에 실력이 붙자 자신감이 생겨 프로게이머들과 한판 붙고 싶은 열망에 차올랐던 것이다. 마침 이듬해 3~4월에 큰 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성호는 대회에 출전할 야무진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에 가는 꿈을 다질 때 ‘프로게이머’의 인생을 동경하기 시작한 성호는 프로게이머가 많기로 소문난 클랜(동호회)에 가입해 게임 레벨을 높여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 지역에서 30위까지 기록할 정도였다.
한창 게임에 미친 상태로 성호는 집에서 버스로 30분이 넘게 걸리는 시 외곽의 홍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처음 성호가 홍명고등학교에 배정을 받았을 때,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울산에서도 도심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통학이 어려운 학교였는데, 하필이면 성호가 포함이 되었으니 한숨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왕이면 집 근처면 얼마나 좋을까. 몇 분만 걸어도 학구열이 좋다고 소문난 학교도 많건만.
그러나 어차피 돌이킬 수 없으면 즐겨야 했다.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홍명에 인재 나겠네! 우리 성호가 입학했으니 말이야.’ 하고 마음을 잡으며 걱정하는 성호를 다독였다.
“도심 외곽이라 산속에 파묻혀 있으니 자연친화적일 거야. 공기도 좋고, 풍경도 멋지겠지. 오히려 정문만 나서면 PC방, 노래방 있는 시내보다 훨씬 더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
그러나 아침 일찍 일어나 허겁지겁 버스를 타고 학교에 도착해 6교시까지 정규수업받고, 7~8교시 보충수업에, 저녁 먹고 6시 반부터 밤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고등학교 생활을 성호는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버거워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성호가 진학한 학교는 명목상 자율학습일 뿐 실제로는 의무적으로 야간 자율학습을 실시하고 있었다. 밤 11시에 집에 도착해 새벽 1시까지 게임 연습에 매달리다 지쳐 곯아떨어지는 일과를 반복하던 성호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나를 붙잡고 말했다.
“엄마, 나 야간 자율학습 좀 빼주세요.”
직접 담임선생에게 이야기해 봤자 혼쭐이나 안 나면 다행이니 내게 SOS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어떻게 할까……? 성호 의견을 좇아 자율학습을 그만두는 게 정말 좋은 일일까?’
고민이 안 되었다면 새빨간 거짓말이리라. 공부할 시간에 게임하겠다는 자식이 마냥 예뻐 보이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성호에게서는 확고한 의지가 엿보였다. 하기야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데, 공부가 눈에 들어올 리도 없었다. 자율학습 시간에도 몰래 게임에 관련된 책을 읽거나, 그것도 불가능하면 멍하니 천장을 보며 공상 속에서 게임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어정쩡한 시간이 지옥 같을 거였다.
“다른 방법은 없겠니?”
차분히 물었지만, 성호의 대답은 확고했다.
“엄마, 저 언제나 믿는다고 했죠? 그리고 인생은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해요. 이번에 꼭 도전해 보고 싶어요.”
그동안 엄마가 했던 말을 그대로 써먹는 기특한(얄미운) 녀석!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성호 앞에서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엄마가 선생님께 말씀드려 볼게.”
“고마워요, 엄마!”
나는 다음 날 학교를 찾아 게임 대회 연습을 위해 성호를 야간 자율학습에서 빼주십사 담임선생님을 설득했다. 그렇게 성호의 게임 대회 도전기가 시작됐다.
나는 믿었다. 게임에 몰입하는 성호를 보며 걱정이 컸지만, 몰입하는 아이는 걱정거리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그 몰입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만 있다면 놀라운 결과를 보여줄 수도 있을 거라고 나는 믿고 또 믿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할 뿐, 몰입하지 못하는 아이들보다는 몰입할 줄 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내 생각의 전환은 성호의 게임 중독을 대하는 자세 역시 180도 바꾸었다. 성호의 몰입을 다른 쪽으로 계발할 수만 있다면 굉장한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임에 몰두하다 NC소프트의 김택진 대표처럼 직접 게임 회사를 만들고 싶은 욕구가 성호에게 생기지 말란 법도 없었다. 성호가 어느 날 게임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 “엄마, 『그리스로마 신화』를 게임으로 만들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 이제부터 게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할지 누가 알겠는가. 실제로 성호는 게임에 관련된 책은 무엇이든 무섭게 집중해 파고들고 있었다.
어느 부모님들은 아이가 게임에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현실 세계를 잊고 가상현실 속에 헤맬 가능성이 높다며 걱정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한창 『해리포터 시리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그때에도 나는 성호에게 이야기했다.
“롤링이라는 아줌마도 카페에 앉아서 머릿속에 그리던 상상의 판타지 세계를 글로 썼대. 상상만으로 멋진 세계를 만들어낸 거야. 우리 성호도 이다음에 멋진 상상력을 키우면 참 좋겠다. 그치?”
안철수 교수는 촉망받는 의사였다. 의사라는 직업에 재능이 없어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연구로 눈을 돌린 게 결코 아니다. 많은 이들이 잘 모르지만 그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연소 의과대학 학과장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의사라는 직업에서도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과감히 흰 가운을 벗었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는 많았지만, 병든 컴퓨터를 살리는 의사는 대한민국에 없었고, 무엇보다 컴퓨터 백신 연구에 무한한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야 이론이 없겠지만, 당시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아마도 백이면 백 전도유망한 사람이 미쳤다고 비아냥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자신이 꿈꾸는 길을 향해 과감히 진로를 틀었다. 그리고 그 진로를 향해 열심히 달렸고, 오늘의 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