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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온 Mar 22. 2022

도망이 필요했다


지난 연말, 무작정 '도망이 필요하다'를 되뇌며 늦은 저녁, 도망갈 곳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이 없고 혼자 조용히 있을 곳이, 집이 아닌 낯선 곳의 고요와 적막이 필요했다.

다음날 바로 떠나고 싶은데 어떤 단어로 검색을 해야 그런 곳을 찾을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은 채 한참을 검색창만 멍하니 바라봤다.

조용한 숙소, 사람 없는 숙소, 한참 검색하다 보니 '북 스테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북 스테이는 조용하겠지.

마음에 드는 여러 곳을 예약 불가로 아쉽게 넘긴 후에 한 곳을 예약했다.


다음날 느지막이 햇빛에 반짝거리는 갈대 가득한 자유로를 지나 파주로 떠났다.


파주에서의 1박 2일은 원하던 고요와 적막을 마주한 나날이었다.

책으로 가득한 공간엔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거리에는 한기 가득한 바람 소리만이 가득했다.

몇 없는 사람들조차 그 고요의 한 조각인 마냥 그저 소리 없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혼자 다른 시간 속에서 유영하는 기분을 오랜만에 만났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하염없이 걸었다.


돌아오는 길이 현실 속으로 점점 들어오는 것만 같은, 그런 날이었다.





해결되거나, 해소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날의 기억이 그저 너무 좋았다.

불현듯 생각날 때마다 그때 미처 예약할 수 없었던 숙소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들어가 본 숙소 사이트에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미 다 예약되어 있던,

와중에 가장 가보고 싶었던 숙소의 방이 예약 가능으로 바뀌어 있었다.

해가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운이 좋게도, 누군가의 취소를 기회삼아 다시 떠났다.


또다시 파주였다.

이 정도면 파주를 도피처로 담아둬도 될 만큼 그곳의 고요가 좋았다.

햇빛이 촤르르 떨어지는 자유로를 달릴 때면 현실을 벗어나는 터널을 지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다른 시간으로 또 들어갔다.


사진으로만 보던 숙소는 더 마음에 들었다.

이곳이 내 아지트면 좋겠다, 마음으로 담아둘 만큼 내적 애정도가 가득해졌다.

햇볕이 쏟아지는 공간 안에 민들레차를 우려 책과 함께 자리 잡았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벗 삼아 공간 속에 녹아들었다.

차를 권하는 나를 그곳 사람이라 착각하시고 질문을 하실 만큼, 그만큼.


해가 지고 나서야 여느 동네보다 빠르게 가게 문들을 닫는 동네라는 걸 깨닫고 부랴부랴 숙소를 나섰다.

사장님의 추천을 받아서 간 가게에서 처음 도전해본 내추럴 와인은 성공적이었다. 물론 음식도.

다 먹어갈 때쯤 사장님과 대화 중에 '거기 사장님이 이 와인 좋아하시는데'라는 말을 들었다.

남은 와인을 들고 숙소로 들어오며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와인 한잔 같이 하실래요?'


가져온 와인을 보고 사장님은 놀라셨다. 본인이 좋아하시는 와인이라면서.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코로나가 풀리면 제일 먼저 가고 싶은 여행지도, 가져온 책의 취향도 비슷해

신기하고 놀라운 마음에 와인을 다 마시고 나서도 맥주를 한잔 더 할 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마음이 맞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일은 여행 중에나 가끔 생겼는데,

여행까진 아니라고 생각한 일정에서 이런 일이 생긴 걸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아, 이것도 여행이구나.


머무르는 시간이 고작 하루라는 게 아쉽고 또 아쉬운 밤이었다.




답답한 하루가 계속되는 나날 속

그날의 공기가 그리워 곱씹고 또 곱씹는, 늦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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