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어른이 되고 나서 좋은 점은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고 나서 안 좋은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잘 안 읽는다는 것이다. 정보전달 위주의 글만 읽었던 2019년의 나는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살인자들과의 인터뷰', '현대 이상심리학' 같은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매일 죽은 사람들과 죽인 사람들이 난무하는 글을 읽고 있자면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 같기도 또렷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범죄심리학 수업을 하고 있을 때라 그 핑계 삼아 읽었지만 다양한 사건과 그들의 심리상태는 오랜 시간 동안 나의 관심사였다. 코로나 19로 열릴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학생들에게 인기 있던 수업인지라 다음 학기에는 더 풍성한 내용을 담고 싶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범죄가 일어나고 난 후의 사람들의 이야기도 중요하기에.
저자인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는 독일의 변호사이자 작가이다. 45세의 나이에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이름을 알렸고 현재는 독일 및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는 그의 책이 총 세 권 출간되었고 그중에 소설은 없다. 다만 그가 변호한 사례를 다룬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Verbrechen "Crime")' ,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2(Schuld "Guilt"),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Der Fall Collini "The Collini Case")'는 성공적으로 나를 포함한 한국 독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총 11명의 사례를 다룬 이 책은 의사 프리트헬름 페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로트바일에서 평생 성실하고 "성자"소리를 듣던 일흔두 살의 노인이 아내를 토막 살인한 사건이었다.
p. 19
이날 밤 페너는 자신의 인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이 집에 갇힌 죄수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카이로에서 그녀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 맹세도 떠올렸다.
참으로 끔찍했던 결혼생활이었지만 페너는 약속을 지켰다.
...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지속적인 언어, 물리적 폭행에 시달리던 남편은 젊은 시절에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약속의 포로가 되어 아내의 학대를 참고 견딘다. 도대체 어떻게 버틴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을. 이 사람에게 처벌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질까? 범인이 다시 같은 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과연 페너가 다시 살인을 저지를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나긴 변론을 하면서 저자는 페너의 인생과, 그가 나락으로 떨어졌음을 말한다.
P.25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제가 그녀를 죽였습니다. 아직도 그녀를 사랑합니다. 아내에게 약속했었죠, 내 여자는 당신뿐이라고. 내가 죽을 때까지 이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약속은 제가 깼습니다. 남은 생애 동안 죄를 안고 살겠습니다."
진술을 끝내고 자리에 앉은 페너는 입을 굳게 다물고 바닥만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법정 안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판사조차 가슴이 무거운 것처럼 보였다.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동생을 죽인 누나, 사랑을 위해 사체를 유기한 연인, 23㎡의 공간에 갇혀 미쳐버린 경비원 등 밀도 있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는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을 돌덩이로 짓누르는 기분이 든다. 과연 무엇이 '정의'이고 그것을 인간이 온전하게 판단할 수 있는지 말이다. 그 어쩔 수 없음을 쉬라크는 담담하고 짧은 문장들로 풀어내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해하는 것은 분명 가장 끔찍한 죄악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그 행동의 정당성에 대해 공감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연일 TV에서 보도되는 정인이 사건이나 유명한 연쇄살인범 유영철처럼 그저 희열을 느끼기 위해 폭행과 살인을 일삼는 자에게는 우리 모두 분개한다. 하지만 페너, 테레사, 이리나와 칼레처럼 그와 반대되는 경우도 분명 있다.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다는 쉬라크의 변론은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에도 머릿속을 무겁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