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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블로프 Oct 16. 2020

나는 왜 쓰는가.

평론가, 지인, 그리고 독자.

 글을 마치고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내 미완성 원고를 읽어보겠다고 나서 준 두 사람에게 완성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마 이들이 내 글의 첫 독자가 될 것이다. 나도 곧 이 글을 다시 읽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맞춤법이나 어색한 표현을 고치기 위함이지 독자로서 읽는 것은 아닐 거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들 앞에 자기 생각을 그대로 내놓는다는 것이다. 내놓고 나면 그것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글의 어머니인 작가는 자기가 쓴 글을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며 여기저기에 내놓는다. 일단 많이 봐주길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바람과는 달리 평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 


 초장부터 이 글은 틀려먹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표현과 단어들을 써놓고서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 아니냐는 것이었다. 가독성이 나쁘다는 지적도 있었다. 내용이 난해하기만 하지 재미는 하나도 없다며 비판도 받았다. 나는 학부모가 되어 아들을 험담하는 선생에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다 이 부모 된 자의 잘못이고, 잘 타일러서 고치겠다고 했다. 선생은 작가의 이 글 솜씨 자체는 좋다며 위로를 했으나, 사실 하나마나한 것이었다. 작품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인데도 너무 순순히 받아들인다며 되려 사과도 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위선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한참 동안을 내 글에 대한 비난과 자신에 대한 기만을 늘어놓던 그 작가는 선심이라도 쓰듯 고친 글 500자를 나한테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아직까지 그에게 답장을 하지 않았고, 영영 하지 않을 생각이다.


 작가의 심정은 이런 것이다. 아무리 노인과 바다를 쓰며 자신의 고결한 품성을 드러낸 헤밍웨이라도 초고에 대해 그런 평가를 들었다면 성을 내며 주먹다짐을 하려 들 것이다. 비평가들은 작품에 대한 평가와 작가에 대한 평가는 엄밀히 분리해야 할 것이라며 생색을 낸다. 그러나 작가는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거나 관용을 베풀 수 있을지언정 그들의 창작물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참지 못한다. 겉으로는 고개를 푹 숙이더라도, 속으로는 저 비평가의 잘난 대가리를 어떻게 피투성이로 만들까 하며 고뇌하는 것이 작가다. 


그러나 작가들이 그 비판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결함들과 그것에 대한 지적들을 떠올린다. 가령 초등학교 반장 선거 때 연설 내용이 두서가 없다며 아이들에게 조롱받던 것이 떠오르고, 중학교 글짓기 때마다 장문의 글을 써냈으나 한 번도 상을 받지 못한 것이 떠오르고, 고등학교 때 시 한 편을 써내 선생에게는 고상한 뜻이 담겨있다며 칭찬을 받았지만 정작 낭독한 학생들 앞에선 웃음만 받던 것이 떠오를 것이다. 작가는 이때 비관의 단계에 접어든다. 자기 글이 쓸데없이 겉멋만 든 쓰레기이며, 어차피 소설은 앞의 다섯 문장만 읽어도 그 가치가 판명 난다는 비평가들의 가시 돋친 말들을 무방비한 상태로 수용하게 된다. 그들은 평론의 노예가 되어 비평가들의 '왜 글을 쓰냐'라는 질문에 힘없이 '작품 하나는 그래도 완성하고 싶어서'라고 힘없이 말을 한다. 그러면 평론가들은 신이 나서 그런 글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차라리 공모전의 평가 항목에 맞춰 새로 글을 쓰라고 작가를 닦달한다. 그들은 작가가 자신이 원하는 글을 쓰기만 한다면, 작가가 무슨 일억 상당의 상금을 타서 자기에게 무슨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기대하는 듯하다. 정작 작가는 자기들이 잘 되기만 한다면, 그 비평가들의 목을 따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벼르고 있을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이제 일말의 진실을 말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작가의 가족이나, 친구들이다. 이들은 글보다는 작가에 집중해, 글에 난해한 표현들이 있더라도 이를 비교적 쉽게 이해하고 넘길 수 있다. 이미 다른 글들도 수 없이 봐왔기 때문에 익숙한 것이다. 이때 그들에게 들어오는 것은 내용인데, 그것은 앞서의 비평가들이 볼 생각들도 하지 않던 것들이다. 그 비평가들은 표현에 집착하여 글에 부스럼을 내는데 혈안이 난 족속들이기 때문이다.


"왜 등장인물은 이때 이런 일을 하지?"

"이건 어디서 벌어지는 거야?"


작가는 이러한 설정 문제들에 대해 친절하게 답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듣고 싶었던 지적이다. 그들은 등장인물들이 어떠한 동기를 가지고 움직이며 소설에는 적지 못할 뒷이야기까지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미흡한 부분은 후에 적을 것이라고 스포일러까지 한다. 그들이 보내는 원고는 대다수가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지인들은 이미 수많은 미완성 원고들을 봐왔다.


 작가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이들은 비평가 따위가 아니라 이런 가족과 친구들이다. 비평가들에게 심한 욕설을 들었을 때, 이들은 그 욕설을 엄연한 진실로 받아들이고선 오히려 친구의 응원을 논리적으로 부정하려고 한다. 가령 글은 쉽게 써야 하는데 내가 너무 어렵게 쓴 것은 아닌지, 글이 소탈해야 하는데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겉멋만 잔뜩 든 것은 아닌지, 등등. 이때 지인은 비평가들은 절대 하지 못할 것들을 해준다. 정신적 지지와, 글을 계속 써야 한다는 동기와, 그것을 밀고 나갈 용기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성공한 작가들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옳은 것이다. 절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마라. 아픔 없이 탄생하는 작품은 없다. 그중 가장 맘에 드는 말은 바로, 작가는 작가다운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겉멋이 있든 소탈하든, 현학적이든 담백하든 어쨌든 작가는 자기 색깔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고친다고 해서 더 나아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작가가 비평가들을 위해 글을 쓰는지, 아니면 자기를 위해 쓰는지 물어본다. 답은 작가들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만약 작가가 성공을 한다면, 가장 크게 보상을 받는 이들은 이들이다. 


 세 번째로 글을 읽는 사람들은 앞서의 비평가들보다는 덜 공격적인 자들이다. 이들을 독자라고 하자. 이들은 작가의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분위기가 맘에 든다던지 등장인물들이 맘에 든다던지 하는 말들을 한다. 동시에 이들은 작가에게, 종종 미완성 원고를 내밀어 당황스럽게 하는 그 작가들에게 물어본다. 그것은 작가가 왜 쓰냐는 질문인데, 작가는 이 질문에 한참 동안을 고민하다가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다양한 답이 있겠지만 결국 결론은 자기가 쓰고 싶기 때문에 쓴다는 결론이다. 독자는 질문을 바꾸어, 작가가 독자들에게 뭘 말하고 싶은지를 묻는다. 작가는 그제야 경계심을 거두고 자신의 솔직한 언어를 적는다. 독자들은 이제 작가가 그 메시지를 완성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작가는 신이 나서 글을 빠르게 적기 시작하고, 몇 날 며칠이고 책상에 가만히 앉아있는 때도 있다. 독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본을 받아보게 된다. 작가의 맞춤법은 엉망이며 내용은 두서가 없지만 그래도 핵심 주제는 잘 녹아들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사람이 바로 작가의 독자가 되는 것이다. 작가가 글머리에서 감사를 전하는, 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왜 이 글을 썼을까, 나는 그저 솔직하게 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썼다. 내 메시지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혹독한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글을 막 마쳤을 때 내게 든 생각은 그저 몸 안에 있던 마구 꼬인 실타래를 겨우 토해냈다는 생각뿐이었다. 피곤했지만 그래도 끝냈다는 안도감에 얼굴에는 미소가 퍼졌다.


 이제 나는 내 메시지에 공감하였다고 해서 글에 애착을 가질 생각도 없고, 비판을 가했다고 해서 그 사람과 싸울 생각도 없다. 작품에 대해서 어떻게든 써내려고 집착하던 시기는 지난 것 같다. 이제 글은 어엿한 어른이 되어 내 손을 떠난다. 나도 이제 한 사람의 독자가 되어 글을 읽을 것이고, 아마 20년 뒤에는 이 글이 그저 유명 작가의 수필을 교묘하게 베껴낸 것에 불과하다며 얼굴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그저 이 집착마저 끊고 글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싶다. 


 한 가지만 더 말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을 완성했다. 이제 이 글의 가치는 독자가 판단할 테지만, 나는 글의 어머니 된 자로서 미약하게나마 걸음마를 뗀 글을 사랑했다. 


 이 글을 읽어준 비평가, 친구, 독자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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