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엔 빛이 없었다. 두려움과 외로움은 내 단짝이었다.
"아빠 없는 사람 손 드세요."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난 있는 척할 배짱이 없었다. 난 무력한 어린아이였다.
그 시절엔 왜 가정환경 조사를 했을까? 집에 TV나 냉장고가 있고 없음이 학교 생활과 무슨 관련이 있었을까?
새 학기 첫 일주일은 내게 공포의 시간이었다. 서면조사는 최상의 친절이었다. 가정환경 조사서에 적은 '아빠 없음' 표시를 친구들이 볼세라 얼른 내면서도 그 짧은 순간이 길게 느껴졌다. 눈 감고 손들게 하는 선생님이 대다수였다. 한 반 70~80명의 학생들의 상황을 빠르게 조사하는 방법이었겠지 싶다.
눈을 뜨고 손들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순간이었다. 친구들과 다르다는 사실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빠가 돌아가신 게 내 잘못이 아닌데 한없이 부끄러웠다.
친구들에게는 다 있는 아빠가 나는 왜 없을까? 내가 '외계인'처럼 느껴졌다.
실생활에서는 아빠의 부재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빠에 대한 추억이 거의 없다. 그냥 내 생활은, 우리 집은 그게 자연스러웠다. 고생하는 엄마가 걱정될 뿐이었다. 한 분 남은 엄마마저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외할머니가 우리를 돌봐주셨다. 오빠와 나, 여동생까지 셋이서 지낸 적도 많다. 일터에서 늦게 돌아오시는 엄마를 기다리며 우리는 그림을 그렸다. 나와 여동생은 드레스 입은 공주를 많이 그렸다. 지는 걸 싫어하는 오빠는 강해지고 싶어서였을까? 태권브이를 정말 잘 그렸다. 종이 인형도 오렸다. 마론 인형을 갖게 된 후에는 인형 옷을 만들었다. 몇 시간씩 자투리 헝겊으로 오리고 바느질하기를 해가 져 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했다.
열 살 무렵 엄마가 계몽사 소년 소녀 세계 위인전집을 사주셨다. 글씨가 작고 삽화가 거의 없는 책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을 읽고 간디를 읽으며 생각했다.
"세계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이야. 나는 이 위인들을 읽었으니 내가 어른이 되면 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전두엽이 발달하기 전이라 분석적 사고가 어려운 나이였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내게는 필요했다.
한니발 장군이 코끼리를 이끌고 눈보라를 뚫으며 알프스를 넘거나 탐험가 피어리가 동상을 무릅쓰고 북극점을 밟을 때, "인생은 쉽지 않구나! 위인은 모험과 도전이 일상인데 난 참 편한 생활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책은 보모처럼 나를 지켜줬다. 늦은 밤 엄마가 귀가하시기까지 내 곁에는 책이 있었다. <초원의 집>을 읽으며 로라와 가족들 옆에 끼어들어가 알콩달콩 재미있게 지냈다.
결핍이 컸던 만큼 강하게 자랐다. 예민했다. 예민한 감수성 덕분에 논술 강사로서 학생들을 잘 돌본다. 무수히 읽었던 책 속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들려준다.
"얘들아 국토의 80%가 북극권인 동토, 얼어붙은 땅 스웨덴에서 세계적인 명차 '볼보'가 나왔어. 미끄러지지 않는 바퀴, 사고가 나더라도 탑승자가 다치지 않는 차체, 안전한 차는 위험한 환경에서 나왔단다. 너희가 겪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어. 하지만 극복할 때 우리는 훌륭해지고 강해질 수 있는 거야."
아이들에게 전하는 말이지만 여러 팀을 수업하며 반복해서 말하고 듣는 내게 가장 강력한 다짐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