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 거리를 걷다 문득 든 생각
신이 빌려준 조각가라고 불린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형상은 처음부터 돌 속에 있다. 나는 단지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냈을 뿐이다”
혹시 내 안에도 형상이 이미 존재하지 않을까 기대하게 하는 황홀한 말이었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 나와 너무나도 다른 언니가 이 생각의 근거였다. 같은 부모 아래에서 같은 밥과 반찬을 먹고 함께 밀가루 반죽을 만지며 자랐다. 언니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 읽기 바쁜 어린이가 되었고 난 한 권에 50원을 주겠다는 엄마의 부탁에 겨우 책을 읽는 어린이가 되었다. 친척 어른들은 언니의 승부사 기질이 엄마를 닮았다 했고, 내 무른 성격도 엄마를 닮았다고 했다. 엄마는 우리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됐다.
어떤 경험을 겪던 지금의 나가 되었겠지라고 생각하면 안도감이 든다. 어찌어찌 살아도 살아지겠지 싶은 안일하고 게으른 마음이다. 다만 이런 더딘 속도로는 최종 형상을 완성하지 못한 채 땅에 묻힐 것 같다는 불안이 뒤따라온다. 이번 생은 미완성작으로 남는 것이다. 바람에 깎여 형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면 좋을 텐데, 아마 너무 깊은 곳에 묻힌 것 같다. 누군가 미켈란젤로처럼 내 안의 형상을 발견하고 귀띔해 주면 좋겠다. 이럴 때마다 난 조각칼과 망치 대신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점신’을 클릭한다.
마음에 드는 형상이 있으면 천직으로 삼고 몰두할 셈이었다. 점신은 나에게 은행원, 사업가, 인수합병 전문가를 추천해 줬다. 난 정장이 안 어울리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글자 투명도를 5% 정도로 낮춰본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직업을 말해줄 때까지 사주 사이트 서너 곳을 드나들며 생년월일시를 입력했다. 만성적으로 이 짓을 하다 보니 생년월일시 열 자가 닳고 닳아 먼지가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한 사건을 계기로 지긋한 천직 찾기 놀이를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 연남동에서 본 타로가 결심의 발단이었다. 골목길에 위치한 타로집에 홀린 듯이 들어가 프리랜서와 직장 중 무엇이 좋을지 물었다. 고양이 아이라인을 한 할머니는 무엇을 하든 재성이 넘칠 운이라고 하셨다. 기분 좋게 결제하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시 나를 앉히시더니 둘 중 어디가 더 좋은지까지 알려주시겠다는 것이다. 솔깃한 나는 카드를 한 장씩 더 뽑았다. 카드를 뒤집자 깨진 유리와 천둥 번개가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채롭게 불길했다. 순간 재생 버튼을 잠시 멈춘 것처럼 타로 카페에 적막함이 흘렀다. 왠지 느려진 듯한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실 나보다 나의 운세가 좋길 바라는 것은 저쪽이겠지 측은지심이 들었다. 내 말에 손님들의 희로애락이 왔다 갔다 하니 생각만 해도 고되다.
가게 밖을 나와 경의선 숲길을 걷자 양옆으로 사주, 타로가게들이 줄지어져 있었다. 이 수많은 가게를 존속하게 하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순간 그곳이 믿음의 부재 거리 같았다. 내가 정말 운명을 믿는다면 돈을 낭비하는 짓은 처음 사주를 본 2016년 여름에 끝났어야 했다. 누군가는 저런 것을 왜 믿냐고 하지만, 사실은 믿고 싶을 만한 것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이 거리를 먹여 살리는 건 확신론자가 아닌 나 같은 의심론자 같았다. 이들은 늘 결과에 의문을 품은 채, 새로운 가게를 찾아 나선다. 아이러니하게도 운명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이 거리를 존속하게 하는 메커니즘 같았다.
신이 빌려준 미켈란젤로도 기어이 조각칼과 망치를 직접 쥐었다. 자신이 무수히 두드린 망치질에 날린 대리석 가루를 뒤집어썼을 것이다. 예전에는 ‘형상은 처음부터 돌 속에 있다.’에 감탄했다면 이젠 ‘나는 단지 불필요한 부분을 깎았을 것이다’를 생각한다. 결국 조각은 나의 몫임을 되뇌는 것이다.
꿈을 만나기 위해 점신 화면을 띄우는 대신, 일기장을 꺼내려고 한다. 그곳에는 누가 대신 읊어준 것이 아닌 내 손으로 직접 쓴 기록들이 있다. 과거의 나를 단서 삼아 꿈을 조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