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일몰을 바라보며 문득 든 생각
가을이 시작되던 두 달 전 무렵, 더딘 글쓰기 속도의 구원이 되어 줄 것이란 믿음으로 독립출판 수업을 신청했다. ’ 8개의 원고가 필요합니다.‘라는 공고 글 때문이었다. 나에겐 어느 정도 강제성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5주의 시간이 흘렀고, 프롤로그까지 8개의 원고를 완성했다.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원고 제출과 인쇄만을 남긴 상태였다. 본인 선정, 올해 가장 뜻깊은 수확물 1위가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마지막 수업 4일 전, 부산여행에서 바스러진다. 이미 터질 것 같은 여행 가방에 꾸역꾸역 lG그램을 챙겨 틈틈이 원고를 썼다. KTX에서, 숙소에서 문장과 씨름하고 나만 알아챌 수 있는 변화에 뿌듯해하며 이튿날 어느 해운대 카페에서 최종 파일을 겨우 제출했다. 기지개를 켜고 소파에 기대어 통창 너머를 천천히 감상한다. 바다 윤슬이 유난히 아름답다. 후련함과 개운함을 만끽하고 있는데 10분 뒤 울리는 선생님의 코멘트 알람.
’이미 인쇄소에서 제작이 시작되어 인쇄가 불가합니다. 하지만 수업에서 피드백을 드릴게요.’
이상함을 감지해야 했다. 모든 학생이 드라이브에 원고를 제출한 것을 확인했을 때. 원고 관련 문자를 받았을 때. 왜 알지 못한 걸까. 아니면 알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앞으로 남은 이틀을 즐길 자신이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꿈에도 모르는 친구는 나를 대견해하고 있다. 안일하게 굴다가 책을 날려버렸다고 차마 입이 안 떨어졌다. 얇고 작은 입술이 돌처럼 무겁다. 일단은 숨기기로 한다. 힘껏 입꼬리를 광대에 붙여본다. “이제 나갈까?”
카페 앞을 서성이는데, 뒤편에 해운대 해변열차가 보였다. 곧 있으면 일몰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서둘러 열차에 탑승했다. 형광등이 꺼지고 열차가 출발하 더니 하늘이 붉은 석양빛으로 깔리기 시작했다. 황금빛으로 바다 윤슬이 반짝였다. 열차 안까지 빛으로 스며들었다. 곧 사라질 운명인 것도 모르고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왠지 나 같다. 갑자기 울컥한 나는, 이 광경을 하루 30분만 볼 수 있다니. 6시간은 되어야 한다고 은근슬쩍 서러움을 토해냈다.
“좀 오래 아련하겠네?”
친구가 대답한다.
오래 노을을 바라보는 나를 상상해 본다.
책… 책… 내 새끼…. 웅얼거리고 있다.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다.
"저희 바닷가 마감 시간이에요."
무언가를 깨끗이 잊지 못하고, 연연하는 모습을 우린 미련하다고 한다. 상상 속 나는 아련하기보다 미련해 보였다. 아련함의 필수 조건은 찰나 같았다.
생각해 보면 변한 건 없다. 노트북 속 원고 파일은 그대로다. 단지 이틀 뒤, 실물책만 못 가질 뿐. 심지어 그건 원래 세상에 없었다. 인터넷으로 소량 출판 인쇄를 해도 된다. 실제로 견적을 알아보니 4만 원에 4권을 만들 수 있었다. 그날 밤 먹은 고등어회의 가격이었다. 이 일의 실체는 고등어회 小 자였던 것이다. 아련함이 미련함으로 변하기 전에, 다시 여행하는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눈앞에 있는 것에 충실할 것.
해변 열차는 우리를 종착지인 송정 바닷가에 내려줬다. 이마트를 도착지로 찍고 택시를 잡았다. 과일 코너로 시작해 주류 코너까지 이마트를 돌아다니며 장바구니를 채웠다. 바구니를 든 검지와 중지가 저릿했다. 앞서 말한 고등어회를 포장하기 위해 또다시 10분을 걸었다. 숙소에 돌아오니 2시간이 지나 있었다. 티비 앞에 앉아 서둘러 고른 영화는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 여전히 수치스러울 정도로 황당하고 뻔뻔한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위안이 됐다.
책 생각은 조심씩 옅어졌다. 생각의 부피는 몸무게처럼 움직일수록 줄어드는 듯했다. 어느 정도 머릿속이 비워지고 나서야 새 생각이 돋아났다. 나 책 만들기에 진심이었구나. 적당히 바라던 일에 상심한 적은 없었기에. 진심을 확인한 것으로 충분하다 되뇌는 가을밤이었다.
후일담
: 아량 넓으신 선생님 덕에 결국 책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