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하는 여행지에서의 수첩
여행용 수첩을 샀다. 뉴질랜드 출국까지 남은 시간은 두 달, 평소 느끼지 못하는 주도권의 맛을 누리며 계획을 짠다. 여행 계획은 퍼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버스 등급은 프리미엄으로 할지 일반으로 할지, 숙소는 에어비앤비로 할지 게스트하우스로 할지 집요하게 작은 퍼즐들을 짜 맞춰 여행이라는 큰 그림을 만든다.
이모네는 북섬의 오클랜드 버켄헤드라는 한적한 동네에 있었다. 집집마다 모양새가 다양해 산책하고 사진을 찍는 재미가 있었다. 집 앞만 나가도 카메라를 들게 되는 이곳에서 다이어리는 뒷전이 되었다. 게다가 늘 날씨가 맑았다. 여행은 내가 바라던 형태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첩은 하루가 만족스러울 땐 손이 안 가는 물건 같았다.
그리고 1월 1일, 이모네를 떠나 혼자 크라이스트 처치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하늘이 우중충하다. 뉴질랜드에서 처음 겪는 날씨였다. 에어비앤비에 가는 길, 버스 정류장에 어려 보이는 현지 여자애들이 보인다. 삼삼오오 앉아있던 그녀들은 멀리서 캐리어를 끌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싸늘한 기분이 든다. 다른 길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에어비앤비에 가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었다. 점점 가까이 가자 한 여자아이가 중국말을 흉내 낸다. 주변 아이들은 킬킬거린다.
수첩에 에어비앤비까지 갈 방법은 계획했으나, 인종차별 대처법까지 준비하지 못한 난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정류장 벽면에 붙은 노선표를 쳐다봤다. 타야 할 버스 번호는 이미 알았다. 내가 안경을 안 쓰고 있더라면 좀 나았을까. 어렸을 때부터 안경을 쓰면 평상시보다 작아지는 나였다. 라섹을 하고 왔어야 했는데… 내가 나를 탓함으로써 그 아이들의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에어비엔비 호스트 피터는 안경을 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프로필 사진처럼 온화한 인상에 치열이 골랐다. "do you want some tea?" 피터는 주방으로 안내하고 녹차를 우려 줬다. 먹색 털의 강아지 오토가 내 곁에 다가와 엎드렸다. 그래 안경은 죄가 없어. 온갖 따스한 것들 속에서 마음이 조금 진정됐다. 방으로 돌아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캐리어에서 수첩을 꺼냈다.
침대 위에 누워, 아까 겪은 일을 썼다. 난 혼자 영어로 버스를 탈 수 있지만 그 아이들은 한국말로 버스를 탈 수 없으니 내가 더 대단하다고 적었다. 또 뉴질랜드 버스 환승 방법이 얼마나 아날로그적인지 적었다. 그 아이들 바로 앞에서 화를 내고, 아무런 일도 없듯이 여행하는 깡은 없었다. 그저 일기장에서 뒤늦게 주섬주섬 당시 상황을 재해석했다.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자 잃어버린 주도권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이후로도 여행은 경로를 이탈했다. 자전거와 비탈길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예약했던 도미토리룸이 혼숙이었을 때, 다채롭게 황당한 일들이었다. 겪은 일이 믿기지 않아, 수첩을 꺼내 글로 써 두 눈으로 확실히 확인했다. 그렇게 내 감정을 일기장에 전가하고 나면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어쩌면 소심한 여행객에게 가장 필요한 건 꼼꼼한 계획보다 느슨한 일기 일지도 모르겠다. 수첩은 그렇게 간장 종지 같은 내 마음속 찌꺼기를 닦아내 줬다.
여행지에서 수첩은 가끔 꺼내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왜 자꾸 찾고 떠들게 되는 카메라보다 수첩 속 순간일까. 가끔 황당한 그 순간들을 생생히 읽고 싶어 수첩을 펼친다.
아이고 버스 정류장에서 상처받고 방에 처박혀 있었구나,
아이고 언덕 밑으로 굴러떨어져 자전거에 깔렸구나.
그래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구나!
온통 가관인 이야기들 속에 안도감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