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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 Nov 04. 2024

친구가 되지 못한 여자친구들에게

에세이






 십 년 전, 나는 A여대에 붙었다. 기뻐서 집 안을 날아다녔다. 

 여대, 콕 집어 얼마나 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여자친구'들을 사귀고 싶었다. 그 A여대, 드디어 간다. 여자애들, 만나러 간다. 손가락을 벌벌 떨며 수강 신청이라는 걸 했다. 비장하게 실패한 시간표에도 설레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실제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고 매일 즐거웠다. 강의도, 처음 해보는 리포트 작성도 재밌었다. 무엇보다 정말로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 행복했다. 인생을 사랑하게 될 것만 같았다. 

 바야흐로 구 년이 흐른 지금도 물론 행복하기야 하다. 그저 내가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뿐. 다만 화석 학번이 되었을 뿐이다. 나는 현재 마지막 학기를 다니는 고학번 학생이다. 정확히 말해, 사정이 있어 뒤늦게 재입학 한 철학과 재학생이다. 

 캠퍼스를 오갈 때 둘러보며 걷게 된다. 나는 예전보다도 학교의 모든 강의실에 더 애착을 갖게 된다. 쌍문동 캠퍼스의 단아하며 소박한 붉은 벽돌을 사랑한다. 재학할 기회를 얻은 것이라 생각하니 예전의 애틋함이 배가 된다. 그렇게 둘러보다가,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지나가면 신경이 쓰여서 어깨가 굽기도 한다. 피부가 너무 곱고 앳된 학생들. 라운드 숄더가 영 낫지를 않는다. 자격지심에 비례해 어깨가 바싹 굽어버린다. 

 걷다가 문득 주접스럽게 눈시울을 붉힐 때도 있다. 아, 여기에서 놀았지. 인문대 뒷편 벤치에서 커피 마셨지. 함께. 여러 친구들, 여자친구들을 사귀었다. 친절하고 상냥하던 여자애들. 재밌고 똑똑하던 학생들. 즐겁던 기억들. 

 이제는, 스물아홉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은근히 어깨가 솟는 언니가 되었다. 스무 살 후배에게, 구 년 전의 자기를 투영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어졌다. 어떤 고민을 듣다가 문득 화가 나서 입을 연 적이 있었다. '외로움은 인생의 기본값이다.' '혼자인 것을 견디지 못하면 안 된다.' 그렇게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식으로 어쩌고저쩌고 물에 물 탄 충고들을 늘어놓았다. '언니, 나도 알아.' 이제는 데면데면해진 그 친구는 그때 ‘그런 건 알아도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답했는데, 솔직히 나도 스무 살에는 그런 것은 알아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스무 살에 할 수 없던 일, 스물아홉 살쯤 먹고 겨우 할 수 있게 되어놓고 무슨 훈계를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걸까. 나도 친구로 인해 살아갈 수 있는 스무 살이었는데. 내게는 상냥하고 멋진 여자친구들이 있지 않았나. 비록 모두 환상처럼 머물다 떠났을지라도. 

 사실 더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말해주지 못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많은 스무 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중에서 특히 어린 시절 친구가 없던 이들에게 더욱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자라난 이후에도 여자아이인 여자들, 유년기 혹은 성년이라는 양자택일의 삶을 타고난 여자친구들에게, 유독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 여자친구, 나의 판타지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 




 여자친구, 나의 판타지 

 내게는 '여자친구'들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어린 시절 충족되지 못한 것에 대한 갈증. 그런 욕구는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분명 나에게 원인이 있겠지. 그 죄스러움은 유년에서 왔다. 

 그때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나는 이혼한 집을 돌고 돌아 조부모 댁에 맡겨졌다. 거기서 늘 자고, 먹고, 게임하고, 다시 잤다. 그때를 떠올리면 사람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아이들 사이의 적자생존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생활 양식이었다. 다들 날 싫어하겠지. 하지만 저 사람들은 가족인데도 나를 싫어하는데. 그들에 대한 추억도 그다지 없다. 

 밥 먹을 때만 방에서 나왔다. 친가는 여유가 있어서 조부모는 주상복합의 주인집이었다. 밥 먹을 때 아랫집에서 세입자가 올라와, "손녀분이세요?"라고 묻는다. 할머니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밥숟갈을 계속 푸면서 "하숙생이에요."라고 답하고, 세입자는 황당한 표정으로 되받아친다. "손녀분이잖아요?" 

 때로 양가감정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원망이 가능했다. 나는 장례식이 벌어지는 게 두려워서 할머니가 죽지 않았으면 한다. 돌아가신다? 그런 말 쓰지 않겠다. 그저 죽지 마시기를. 내 안에서 많은 것이 무너져 내린다. 

 세계관이 무너진다. 나의 세계관은 외가 또는 친가였다. 부모가 이혼하면─지저분하게 이혼하면─아이는 어느 쪽이 저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꼭 자아가 분열된 것 같아. 자아분열이 내 삶의 기원일까. 

 자주 집을 옮겼다. 스스로 거머리 같다는 문장을 만들면 거머리는 무슨 죄가 있기에 욕을 먹는 건지 고민했다. 아빠는 나를 맡기며 할머니 말을 잘 따르라고 했다. 가끔 엄마를 보러 가면 엄마는 친가는 미친 사람들이라고 했다. 돌아오면, 할머니는 네 엄마는 창녀고 너도 똑같은 년이라고 했다. 아빠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나는 다시 엄마를 보러 간다. 그리고 계속 나는 돌아온다. 

 나는 말 잘 듣는 아이. 내가 장난감을 사 달라고 하면 가족은 다른 가족의 얼굴에 그걸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내 안에서 던진 사람과 맞은 사람, 두 얼굴이 분간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의 편인가. 어디에 살고 있는가. 나는 누구지? 내 편은 누구지? 은 정 부르면 내가 아닌 것 같은 이름이었고, 가 족 이라고 말하면 더 멀어질 것처럼 이질적인 음절이었다.  

 내 삶이 영화라면, 그 시절은 나에게 떨칠 수 없는 작품 속 작품이었다. 내 울음소리는 나더러 방법을 찾아달라고 우는 것이었다. 사랑받을 방법을. 구원받을 방법을. 나는 너무나 짧은 내 삶 안에서 살아왔다. 사랑을 갈구하는 비좁은 고통의 세계였다. 사랑이란 것이 이렇게나 고통스러운데 세상의 법칙이 아닐 리 없다는, 순진한 생각을 자주 했다.  

 나를 구원해 주는 것은 누구일까. 적어도 가족은 아니었다. 그들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나는 누구의 편인가. 나는 나를 지지해 주지 못했다. 이제 남은 것은 친구들. 세상에서 나와 가장 비슷한 존재들, 여자친구들. 나를 구원해 줄 마지막 존재들이었다.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고 활달해지려 노력했다. 점차 무리에 속할 수 있었고 학교에 적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에 따돌림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소문으로 돌았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내게는 가정폭력보다도 그 기억이 더 큰 충격으로 남았다. 낙오자, 환대에서 거부된 인간, 그런 표현을 몰라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감각으로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그 이후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사정은 많았지만 역시 가장 두려웠던 것은 소외였다. 나는 아직 이리저리 집을 옮겨 다니며 살았는데, 스스로 다시금 ‘거머리 같다’는 문장을 만들며, 거머리는 무슨 잘못이 있어서 욕을 먹는 걸까 생각했다. 하루하루 잘도 울었다. 대학에 가서 좋아지고 싶었다. 대학에 가면 달라질 것 같았다. 그곳의 친구들은 다를 테니까. 어른이 된 친구들은 분명 착하고 친절할 테니까. 이 외로움의 굴레를 끊어내어 줄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구원을 바랐다. 

 스무 살에 나는 여대로 갔다. 정말 많은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오랜 시간 홀로 방에 오래 있어 본 사람의 목소리로도, 나는 그들을 찾고 또 불렀다. 사랑 했고, 받았고, 내 인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어 순리처럼 실망했고, 배신당했고, 상처 입었다. 이내 돌이킬 수 없이 불신하게 되었다. 어느덧 나는 스물아홉이 되었고, 눈을 뜨면 혼자를 견디는 것이 인생이라 말하고 있었다. 




끝내 외로운 인생 

 내 일에는 잘 울지 않지만 슬픈 걸 보고는 잘 울게 된다. 이제 나는 친구에게 나의 고독을 토로하며 펑펑 울지 않는다. 사람과 이별할 때 흘리지 않던 눈물을 슬픈 영화를 볼 때 다 터뜨리곤 한다. 나 이제 아기, 강아지, 하늘을 사랑해. 관심 없던 꽃들의 이름을 알고 싶어. 사람은 변할 수 있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 미숙하던 시절의 이별에 그런 변명을 덧붙이고 싶지만, 들을 사람은 모두 떠나가고 없다. 가끔 삶의 여석이 쓸쓸하게 여겨지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게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내 곁에 사람이 앉을 자리가 없다. 여석을 타고난 인생이 따로 있는 걸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세상에는 끝내 외로운 인생도 있지 않을까? 자주 의문하곤 했다. 인생이란 원래 외로운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또 그 인생이 매일 행복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어릴 적 아주 어두운 노래를 좋아했다. ‘삶은 조금씩 힘겨워져만 가는 걸 깨닫는 나이가 되고’라는 구절이 있는 노래를. 내가 그 ‘사실’을 언제 알게 되었더라. 어쨌든 깨닫는 나이는 온다. 삶은 조금씩 힘겨워져만 가는 걸, 깨닫는 나이가 되고, 울 일에도 웃고 고통에도 삶을 안아줄 수가 있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경구가 이제는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더욱이 그런 것 같다.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도리어 그것이 허망하지 않아진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사랑한다. 나는 나의 운명을 사랑한다. 

 나는 영영 외로울 운명일지 몰라도, 그 친구들은 견딜 일 없이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만큼 사랑했다. 그만큼 그들은 나의 신화였다. 끝내 친구로 남지 못했던, 사랑했던 모든 친구들, 행복하길 바란다. 





친구가 되지 못한 여자친구들에게 

 어릴 적 친구를 만들지 못했던 사람들, 다들 스무 살이 넘고 나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언젠가 인생을 홀로 살아야 했을 때를 겪었다면, 어릴 적보다 단단하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외로울 때면 무엇을 하며 버텼을까. 나는 친구에게 자신을 꺼내놓고 펑펑 울었는데. 그러다 구 년 뒤에 눈을 뜨면, 차라리 혼자를 견디는 것이 인생이라 말하는 스물아홉 살이 되어 있었는데. 

 세상에는 이런저런 인생이 있어서, 이것은 아주 사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세계란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니까, 때로 가장 개인적인 성취가 가장 궁극적인 성과를 의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거대하고 중대한 세상 이야기가 아니지만, 내 고독이었던 이야기와 당신의 고독이었던 그것이 이어져 어떤 소망을 이룬다면 그건 그것대로 세계의 발전이 아닐까. 한마디로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고독하다는 것은 낙오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별은 실패가 아니며, 실패조차 절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끝내 연결되지 못할지라도, 서로가 존재해 준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비록 인생이 외로운 것일지라도 당신이 행복하길 바란다.  

 실은, 모두 되도록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서로를 믿기 힘들고, 서로를 잘 모르는 외로운 세상이지만, 서로의 행복을 빌고 싶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것. 죄송할 필요도 부끄러울 필요도 없다는 것. 설령 그런 감정이 든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당신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 그런 말들을 건네주는 정도는 조언을 허락받고 싶다. 영원히 나의 여자친구일 수 없는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다. 위로하고 싶다. 끝끝내 친구가 되지 못한 여자친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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