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야기
늘어지게 늦잠 자고 일어난 토요일 오전,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평소 시원시원한 결정과 현장 리더십으로 존경해 마지않던 상무님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주말 아침에 문자도 아니고 전화라니! 받아야 하나 망설이는 동안 벨 소리가 끊긴다. 부재중 통화가 뜨는 액정을 바라보는데 불현듯 엄습해 오는 불길한 예감. 뭔 일이 터졌구나!
서둘러 두 번째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의 여를 미처 끝내기도 전에 핸드폰 너머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 소리.
"누가 일 이따위로 하라고 했어, 응?"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댄다. 격앙된 목소리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곧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상무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흥분된 목소리로 "니가", "누구 마음대로", "감히", "당장" 과도 같은 말들을 쏟아 내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툭 끊어져 버린 전화.
폭풍처럼 몰아치던 통화가 끝나자 멍해졌다.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남편이 옆에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아무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았다. 기운이 다 빠져버린 탓에 할 수도 없었다. 힘없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집 앞 산책로를 향해 걷고 있는데 또 전화가 걸려온다. 이번엔 과장님이다. 상무님이랑 통화했냐며 미안하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괜찮다고,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 주전이던가.
매장을 돌다 저녁 늦게 사무실로 들어온 상무님이 자리로 찾아왔다. 아리따움 매장 앞 바깥에 둘 매대가 필요하단다. 원하는 사이즈와 재질,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을 서서 자세히 풀어놓더니 최대한 빨리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성격 급한 상무님은 평소에도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팀장, 선임을 거치지 않고 바로 담당에게 찾아와 업무 지시를 내린다. 일분일초가 다급한 현장에서 위계질서 따지고 팀 간 R&R에 망설이다 보면 전쟁과도 같은 화장품 로드숍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날도 그랬다.
그런 상무님이 참 좋았다.
상무님은 20대인 나보다 화장품과 패션으로 유명한 다음, 네이버 카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계신 트렌드 세터, 얼리어답터였다. 이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쿠션 제품도 상무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모레퍼시픽에서 최초로 시도하는 가맹 사업이었던 아리따움도 상무님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3 개월 만에 1,000호점 돌파’와 같은 성과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귀에 이어폰을 꼽고 하천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하는데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필 이럴 때 비라니 지갑도 안 가지고 나왔는데. 순식간에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거센 빗줄기가 눈앞에서 휘몰아친다.
황급히 산책로 위 계단을 뛰어올라 근처 빌라 현관 아래로 가 비를 피했다.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 어느새 빌라 앞 아스팔트 도로엔 물웅덩이가 생기고 무심히 그 위를 지나가던 자동차는 사정없이 구정물을 흩뿌린다.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
비 맞은 김에, 구정물을 온몸에 뒤집어쓴 김에 꺼억꺼억 큰 소리로 울어 버렸다. 내가 뭘 잘못했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얼빠진 채 가만있지 말고 조목조목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하면 좋았을걸, 왜 이렇게 바보 같았을까.
상무님은 허리까지 오는 높이의 커다란 매대를 원했다. 이틀 내로 전국에 있는 모든 매장에 깔렸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 개가 넘는 집기를 이틀 내로 제작하고 배송까지 하는 건 무리였다. 최대한 나흘 안에는 끝낼 수 있도록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마지막 발주를 앞둔 저녁, 팀 한쪽 구석에 놓인 최종 샘플을 보던 팀장님이 조용히 한 마디 하셨다. 너무 크지 않냐고. 이미 세 종류 사이즈의 샘플이 일주일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팀장님도 그간의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거나 바로 위 결제자는 팀장님이셨기에 한 번 더 보고를 드렸다.
"에이, 그래도 이렇게 큰 건 아니지 않니?
조금 작은 사이즈로 샘플 한 번 더 뽑아봐."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업체 사장님께도 미안했다. 다행히 하루 만에 작은 사이즈의 샘플이 도착했고 그제야 팀장님의 발주 결재가 떨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상무님이었다. 당장 발주는 내려야 하는데 외근 나간 상무님은 돌아오지 않고. 그렇다고 입사 4년 차 주제에 핸드폰으로 임원에게 전화 걸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때 들려오던 선임의 한 마디.
"일단 빨리 매장에 나가야 신제품 프로모션을 시작하지! 팀장님이 컨펌했잖아!”
그렇게 상무님이 최종 샘플을 보지 못한 채로 전국 매장에 매대가 나갔다. 프로모션 첫날, 휴일 아침부터 매장을 돌던 상무님 눈에 들어온 작은 사이즈 매대. 상무님이 원한 핵심은 커다란 사이즈에 있었는데 본인은 구경도 못한 작은 매대가 매장 앞에 떡 하니 자리했으니 화가 날 수밖에!
현장에서 일을 많이 벌리시고 다니시던 상무님의 불같은 성격 탓에 한정된 예산을 관리해야 했던 건 늘 팀장님의 몫. 두 분 중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입장에선 어찌나 억울하던지!
주룩주룩 내리는 소나기에 한참을 쪼그려 앉아 서러운 마음을 토해 내었다. 감정이 어느 정도 추스러질 무렵 비도 그쳤다. 지나가는 소나기였나 보다.
일어나 집에 돌아가려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휘청거리며 빌라 한쪽 벽에 엉거주춤 기대어 서 있노라니 내 꼴이 너무 우습다. 다 큰 어른이 비 맞은 생쥐 꼴로 울다가 쥐 나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라니! 울다가 웃어 버렸다.
상무님은 그로부터 얼마 뒤 미안하다며 사과하셨다. 계속 마음에 걸리셨는지 몇 년 뒤 술자리에서도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때마다 괜찮다고 별거 아니라고, 충분히 그러실 수 있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그러다 몇 년 전 우연히 회사 앞에서 맞닥뜨린 상무님, 아니 이제는 부사장님. 나도 모르게 피하다가 그만 눈이 마주쳐 버렸다. 억지로 입만 웃는 얼굴로 어색하게 악수를 나눈 뒤 헤어졌다.
한바탕 소나기처럼 지나갔던, 십 년도 더 된 기억 앞에서 끝까지 쿨하지 못했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