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이’라는 이름, 느슨한 관계가 주는 기쁨
지하철 2호선 봉천역에 내려 큰 기둥에 박힌 '봉천'이라는 글자를 마주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서울에 올라온 그해 가을 강원도 민둥산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들로부터 '봉천이'라는 이름을 얻었던 일이다.
당시 나는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는 민둥산으로 혼자 등산 여행을 떠났다. 오전 열한 시쯤 도착해 역 근처에서 곤드레밥을 먹었다. 기차역에서 민둥산 입구까지 가는 길은 마치 꿈속을 걷는 듯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새벽 도시의 거리를 혼자 걷는 것처럼 모든 게 멈추고 나만 생동하는 묘한 느낌이었다.
흙색을 실컷 본 시간들을 지나 정상에 가까워지자 탁 트인 풍경이 펼쳐졌다. 굽이굽이 무심하게 솟아오른 산세가 장관이고 군데군데 흔들리는 억새가 절경이었다. 그 풍경 안에 있는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몇 발자국 옆에 있던 분께 사진을 부탁드렸다. 그분은 흔쾌히 찍어 주셨고, 나는 답례로 그분과 일행분들까지 총 세분을 함께 찍어드렸다.
그러면서 몇 마디 말이 더 오갔고, 감사하게도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다녀요.”라는 말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분들은 여고에 다니던 학창 시절부터 친구 사이였다. 그래서인지 오순도순 편안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내게 이모뻘인 분들이지만 오랜 친구처럼 친근하고 살갑게 느껴졌다.
우리는 빙 둘러앉아 억새가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를 들으며 김밥이며 과일, 과자를 나눠먹었다. 사실 내가 크게 얻어먹었다.
“봉천이, 이것도 좀 먹어.”
나는 봉천동에 산다고 하여 봉천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진짜 이름을 부르기엔 좀 어색한 사이. 그렇다고 이름 없이 부르기엔 정 없던 차에 봉천이는 정말이지 적절한 이름이었다.
세 친구와 봉천이는 민둥산 풍경을 눈과 귀와 피부로 만끽하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함께 하산했다.
등산과 여행, 자연, 미술, 전시 관람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모두 '누군가의 친구'였던 경험이 있으며, 무엇보다 열린 마음과 정이 있는 분들이라 대화가 여러 갈래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산 후에는 한 지역축제 행사장에서 감자전과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뒤풀이를 하고, 벌레가 잔뜩 먹은 과실 따위를 구경하며 민둥산역까지 걸었다.
같은 시각에 청량리로 향하는 같은 칸 기차를 예약한 것까지 엄청난 인연으로 느껴졌다.
그날 밤 엄마와 이모에게 나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나 함께 등산했다고 기쁨에 차 얘기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혼자인 것도 좋아 흔쾌히 떠난 여행이지만 예상하지 못한 만남으로 여럿이 되어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꽉 차는 경험을 했다.
다행히 그분들도 나처럼 좋은 기억을 안고 계셨던지 얼마 후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이 성사됐고 그때는 수락산을 함께 올랐다.
그 뒤로 한참 동안, 마음으로만 안부를 전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마음과 달리 그렇게 하고 있는 모양은 나의 고질병이다. 자주 그분들의 얼굴과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남몰래 흐뭇해하는데 막상 연락을 드리기가 쉽지 않다.
벼락같은 인연이어서 그럴까. 어느 날 문득 연락을 드려도 심심하게 받아주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