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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neaufgabe Aug 23. 2021

기다린다

내가 오늘 이 시간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오늘 이 시간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있었지만 없었으므로.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오늘 이곳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의식하지 않는 원목 테이블의 나이테 같은 것이 나였다. 몇 개인지 모르겠고 어느 제조사에서 몇년 전에 생산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종일 머리 위에서 인위적인 빛을 내리쬐던 이곳의 백열구가 나였다. 단 한번도 눈을 마주치지 못한 사람들이 나였다. 나는 그들 밖에 있었으므로 그들 안에 있었다.

 

나는 분명하지 않은 시간을 산다. 여기에서 거기 혹은 거기에서 저기. 나는 수시로 꿈을 꾸고 꿈을 꾸면서 돌아본다. 돌아보면 모든 시간은 수정할 수 없는 문장 같아 보이지만 사실 모든 시간은 그것을 돌아볼 때마다 수정된다. 지나간 시간이라 믿은 것은 시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억이므로. 나는 대체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해왔으므로. 인간의 시간 관념이 왜 이런 식으로 설계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계자 나름의 이유가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냥 믿어왔던 대로 믿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있다. 지나간 시간은 수정할 수 없는 문장 같은 것. 바꿀 수 없는 것.

 

무엇이든 돌아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립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만 먹으면 그것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스칠 뿐이다. 세상 무엇보다 분명해 보이는 오늘 이 시간 속에서 세상 무엇보다 분명해 보이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같이 있음에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손 잡을 수 없는 그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 나는 그들로서.

 

부질 없이 돌아본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돌아보는 그것이 오늘 이 시간 처음 보는 이것과 저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내가 당신께 초면처럼 구는 일에 서운함을 느끼지는 않길 바란다. 우리는 명백하게 초면이므로.

 

나는 이제 걷는다. 아직은 걷고 있지 않지만 걷는다고 쓴다. 그러면 나는 걷는 기분이 된다. 나는 그런 기분으로 밤길을 걷는다. 젊은 사람이 많은 길이고 밝은 밤길이다. 어느 정도 밝은 밤길이냐면 눈이 너무 부셔서 눈을 감고 걸어야 할 정도의 밤길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눈을 감고 걷는다. 그러면 나는 눈을 감고 밝은 밤길을 걷는 기분이 된다. 눈을 꼭 감고 있는데도 눈꺼풀 표면에 닿는 빛줄기를 느낀다. 나를 피해 걷는 존재의 기척을 느낀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맹렬하게 걸으면서 기다리고 있다. 적극적으로 기다리고 있다. 조만간 내게 닥치는 인간이 하나 있을 것이다. 눈을 감고 걷는 나를 두 눈으로 보고도 피하지 않는 인간이 하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새끼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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