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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neaufgabe Jan 11. 2022

여름 하루

20190203



여름이와 하루를 두고 집을 나서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특히 하루나 이틀, 때론 그보다 긴 시간 집을 비워야 할 때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는 두 아이를 보기란 곤욕스럽기 그지없다.

 

일요일 저녁에 떠나 수요일 저녁이면 돌아오는 이번 설은 여느 명절에 비하면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짧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만으로 삼 일 간 둘이서 지내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나는 화장실의 모래를 새로 깔아주었고 혹시나 몰라 빈 박스에 모래를 한 봉지 더 깔아두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바닥에 두 개 정도 두던 물 그릇도 행여나 우다다를 하면서 엎거나 쏟지 않을까 세 그릇을 더 두었다. 사료는 커다란 그릇 위에 가득 부어주고는 창가 쪽에 한 그릇을 더 부어두었고 매일 저녁 열한 시에 주던 간식을 오늘은 일어나서 한 번 주고 집을 나서기 전에 한 번 더 주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편치 않다. 수요일에 올 테니까 잘 놀고 있어 하고 말해보아도, 오늘 하루 자고 내일 밤도 자고 나면 그 다음 날이 수요일이야 그날 저녁에 올게 하고 제아무리 말해보아도 아이들은 그저 예쁜 눈을 똘망똘망 뜨고서 나를 올려다보며 갸웃거릴 뿐이다. 아이들이 내 말을 알아 듣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들이 내 말을 알아 들었으면 싶다. 그러면 밤마다 현관문 앞에 앉아서 복도에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야옹 울기도 울면서 막연히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까.

 

몇년 전 여름이와 지낸 지 서너 달 쯤 되었을 어느 겨울 날 갑작스레 몸이 아파서 예정에도 없던 입원을 하루 하게 된 적 있다. 여름이한테 제대로 된 인사도 남기지 못한 채 환자복을 입고 누워서는 고양이는 집에 혼자 있어도 잘 지낸다는 통념에 기대어 나는 애써 걱정스러운 마음을 죽였다. 하지만 이튿날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밤새 얼마나 운 건지, 문이 딸각하고 열리자마자 달음박질 쳐오는 여름이의 울음소리가 말로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쉬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겨울이 끝날 무렵 마산의 어느 가정집에서 태어난 하루를 분양 받은 건 전적으로 그날 일의 충격에 기인한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육 개월 남짓 차이 나는 동생이 생긴 뒤 여름이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그럼에도 며칠 집을 비우고 돌아오면 여전히 여름이가, 그리고 하루가 한사코 나를 기다렸음을 느끼게 하는 흔적이 많다. 그럴 때면 나는 아이들에게 부재함으로써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아이들은 내가 부재할 때 나를 가장 크게 느낀다는 생각.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어서 아이들을 만나 달래줘야지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가벼워지지만 집을 나서야 할 때면 다시 그 기다림의 흔적들이 되살아나면서 내 온몸은 물에 흠뻑 젖은 듯 무거워진다.

 

결국 시간에 기댈 뿐이다. 시간은 흐름으로써 나를 괴롭게 하지만 흐름으로써 나를 살게 한다.

 

수요일은 올 것이다. 그전에 화요일이 갈 것이고 그전에 월요일과 오늘 밤이 갈 것이다.



그 사이사이에는 여느 명절과 같이 감정적으로 고된 순간들이 닥칠 것이다. 여름이나 하루를 잊게 될 만큼 혐오스럽고 끔찍하게 어려운 순간들이 닥칠 것이다. 나는 왜…… 구태여 이처럼 어리석고 고된 사이클을 반복해야 하는 걸까. 나는 왜 시간에 기대어야만 할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시간을 경멸하게 하고, 시간에 빌어 먹게 만들었을까.

 

이런 질문은 수없이 던져보아도 소용이 없다. 조금만 더 캐묻다 보면 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손에 들어올 것도 같은데 그럴 때면 나는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러고 나면 소용돌이다. 소용돌이 안에서는 권태가 없고 상념에 빠질 겨를이 없다.

 

이제 곧 아이들은 나의 부재를 깨달을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는 여느 날과 다르게 귀가가 늦는 나를, 없는 나를 감각할 것이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미리 생각하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 안의 시간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본다. 크리스마스 전에 오겠다며 떠나버린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아이들. 기다리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다시 기다리는 아이들. 그런 마음에 내가 유난하다 싶을 만큼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까닭은 아마도 나 또한 언젠가 그런 기다림의 시간을 살아본 적 있기 때문. 그게 얼마나 살아서 못할 짓인지 모르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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