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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neaufgabe May 21. 2022

미래 산책 연습

나는 언제부터인가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산책을 하다 보면 많은 것들을 보게 되고 듣게 되고 맡게 되기 때문에 나는 산책을 하면서 꼭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자신 아직 감각적으로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건 이를테면 내가 의식적인 문장의 형태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산책하는 마음에 수반되는 순간적인 상태 같은 것이다. 오늘도 나는 대낮의 산책을 하면서 모처럼 햇볕의 뜨거움을 느끼고 부드러운 바람을 맞고 주위의 풀밭이나 나무의 가지와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서로 부대끼는 소리 달리는 자전거의 소리나 자전거의 벨소리 달리는 사람들의 숨소리 걷거나 앉아있는 사람들의 말소리 웃음소리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마스크를 살짝 내린 채 풀 냄새와 민물 냄새를 맡았다.


생각해보면 그러는 동안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은지도 모른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맡을 수 있는 것과 내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피부에 저절로 와닿는 것 그럼에도 불쾌하지 않은 것을 일방적으로 몸으로 수용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서 좋은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몸이고 산책을 하다 보면 그것이 마음이기 전에 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그러한 사실에 아주 단순하게 순전히 좋음과 나쁨 선과 악 미와 추 따위의 판단도 없이 집중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되면 나는 나이기 전에 이곳의 일부임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것 같고 나라는 기점이 비워진 몸이라는 공간은 순간적인 바깥으로부터 불어오는 많은 것들로 채워지면서 나라는 몸의 경계 그 외벽 또한 잠시 잊혀지면서 나와 사회적으로 인위적으로 그러니까 의미적으로 관계 맺는 모든 것은 당분간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생각은 대체로 나라는 기점을 불가피하게 동반한다. 나라는 의식의 결집 없이 생각하기 그런 것이 가능한 일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자아를 거치지 않고는 성립 불가능한 입장과 정리되고 발화됨으로써 나로 은유되는 몸을 대변하게 되는 어떤 언어의 의미들 나는 어쩌면 그와 같은 모든 의미에 지쳐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이지 내가 나를 대변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그것은 정말이지 그래도 괜찮은 일인가. 요컨대 이는 요즘 스스로 가장 많이 자문하는 질문이고 그런 의미에서 삶의 주제와도 같다. 그리고 이는 사랑의 가능성을 궁리하는 일로 자주 이어진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가능한가.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그러니까 내가 이미 너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지만 아무래도 역시 나는 너무 많고 그래서 나조차도 나와 자주 무관해지는 만큼 그리고 아마도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너는 나와 무관할 것이고 그것은 이곳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


그러나 산책하는 동안 나는 언제나 생각하지 않을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순간들은 적극적으로 생각을 요청하고 그렇게 잠시 잊고 있던 나를 불러낸다. 예컨대 오늘은 강가에 서서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다. 강가에 서서 기도하는 사람은 나이  사람이었고 여기서 나이  사람이란 어느 정도 연령 이상의 사람을 가리키는지 나로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을 만큼 언제부턴가 나이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워졌지만  사람은 나에게 육십대 중후반에서 칠십대 초반 즈음의 연령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보통 내가 걷거나 뛰는 산책로는  가장자리에 붙어있는 인도는 아니고 그로부터 오륙미터 가량 풀밭이 있는 언덕이 솟은   곁으로 작은 콘크리트 방호벽으로 구분되는 산책로인데 강가에 서서 기도하는  사람은  그대로 강가의 사람이 없는 인도까지 내려가  채로 합장을 하고서 자신이  지점으로부터 조금  강물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합장을 하면서 정지된 것처럼 그렇게 강을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한번씩 고개를 숙이고 다시 고개를 들고 다시 고개를 숙이기를 반복하면서 강을 보고 있었다. 몇초에 한번씩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드는지 나는 따로 초를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아마도 오초 내지는 십초 쯤에 한번씩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고 다시 숙이기를 반복했고 나는 그의 뒤편 언덕 산책로에서 그의 뒷모습에 가까운 좌측 옆모습을 살짝 내려다보듯이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확인할  없었지만 그는 기도의 말을 안으로든 바깥으로든 읊고 있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앞으로는 푸른 강물이 햇볕에 산란하면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고 그의 뒤편으로는 초록빛의 나무와 풀들 그리고 곳곳에  노란 금계국이 흔들리고 있었고 그는  사이의 시멘트 바닥으로  인도 위에 합장하고 서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가 하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를 보면서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을  없었다. 그가 무엇을 향해 기도하는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 나는 질문하지 않을  없었고 물론 그에게 질문을 던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단지  없는 상상을 이어갔다. 상상의 내용을 구태여  자리에 쓰지는 않을 것이고 어쨌거나 그는 강가에 서서 기도하고 있었고 나는 오늘 산책 중에 우연히 그를 보았고 오래 두고  일은 아닌 듯해 금방  자리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가 누구인지 무슨 이유로 그렇게 휴일의 대낮 강변에 혼자 서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를 잊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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