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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neaufgabe Aug 18. 2022

아인


지난 한 달 정도였을까 진격의 거인에서 아인까지를 쭉 이어서 보면서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두 작품으로부터 에반게리온의 연장선처럼 보이는 구석이 ―제법 짙은 농도로― 느껴졌던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자아에 관한 고민의 주제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세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큰 틀에서는 자아의 형성 또는 인식 아니면 성장 과정의 은유이자 어느 정도는 거울 단계에서 사회화 단계로의 걸음마와 보행 착오 따위를 보여준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는 없겠고, 또한 그 모든 과정의 답 없음을 보여준다는 점이 재미있고, 특히 세 작품에서 저마다 인상적인 이미지로 꼽을 수 있을 에바의 폭주, 인체의 거인화 그리고 검은 유령의 출현이 모두 통제 불가능한 무의식의 형상화와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재미있다. 셋은 특정 순간 한 개인의 육체적・정신적 한계를 넘어서는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전형적인 짜릿함을 안겨주지만 동시에 그 잠깐의 결과가 본인을 비롯한 주변 인물 그리고 환경에 새로운 형태의 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조금 다른 의미의 전형적인 막막함을 낳는다. 그런데 그 이미지라는 것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다시금 반복재생을 하다 보면 꼭 의 어떤 장면들 같다는 느낌,  또한 언젠가 저런 장면들을 살아본 적 있는 것 같다는 느낌, 그냥 다 필요 없고, 전부 죽여버리고 싶다는 느낌, 죽여버릴 수 있을 만큼 죽여버리는 것이 유일하게 남은 지상 과제인 것 같은 느낌, 그것은 말하자면 라는 그릇의 임계점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떤 에너지가 넘쳐 흐르는 경험, 그렇게 라는 이름의 사회적 꼭지점이 어느 순간 깊은 수면 아래 잠겨 실종되어버리는 경험, 유사 이래 지금껏 우리 모두가 만들어 온 인위적인 의미의 길을 송두리째 잃는 경험, 마치 인간이 만든 의미의 꽃과도 같은 가 잠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밟히고 해체되어버린 상태, 그러니까 시쳇말로 그 순간 이성을 잃었다거나 그 순간의 기억을 잃었다는 말은 차라리 잠시 지긋지긋한 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 로부터 를 넘어서는 것으로 비로소 연결되었다는 말, 이름 붙일 수 없는 그곳으로 잠시 돌아갔다는 말, 어딘지 고향 같은 기분을 주는 그곳에 잠시 다녀왔다는 말.


학부 때 함께 시를 쓰는 친구들과 모이면 자주 했던 놀이가 있는데 우리는 그걸 10분 글쓰기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10분 동안 어떤 주제로든지 글을 쓰는 건데 글쓰기의 조건은 단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손을 멈추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고치지 않는 것. 펜을 쥔 채 10분 동안 손을 멈추지 않고, 고치지 않고 글을 쓰면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양의 글을 쓸 수 있다. 당연히 펜이 아닌 키보드를 활용한다면 더욱 더 많은 양의 글을 쓸 수 있다. 10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어서, 600초의 리듬을 고스란히 감각하면서, 그 어떤 검열도 없이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도저히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시간의 리듬에 올라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건 마치 시간이라는 말을 달리는 느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글쓰기가, 글쓰기라기보다는 생각 없이 그것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유산소 운동에 가깝다는 느낌… 그렇게 차차 러너스 하이라고 부르더라도 무방할 것 같은 어떤 순간에 이르러서, 끊임없이 몸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문장을 멈추지 않고 쓰면서, 쌕쌕거리는 자신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다른 어떤 눈으로는 계속해서 시간의 틈을 비집고 샘솟는 시각 기호들의 선형적 흐름을 쫓다 보면,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이런 의미의 말들을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런 문장들을 수도 없이 마주하게 된다. 거기에는 일말의 사회적 체면도 부끄러움도 없다. 글쓰기로부터 경험할 수 있는 (거의) 최대한의 짜릿함만이 있다. 지금 이 순간만은 모든 것이 허락되어 있다. 여기 이 자리에서만큼은 무슨 말이든 가능하다. 나중에 다시 들여다 본다면 쓰레기 중에서도 쓰레기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한 그런 문장들을 마구잡이로 남발하는 데에는 원초적인 쾌락의 발생 지점이 있다. 그것은 결코 아무것도 아니지만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헌법과도 같은 압박감을 주는 규율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잠시나마 선사한다. 이에 관해 나탈리 골드버그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나는 얼마든지 쓰레기 같은 글을 쓸 권리가 있다……” 나는 이 인식의 지점을 글쓰기의 출발점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다.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나를 짓누르는 의 무게감에서 해방되었을 때 로부터 잠시 거리를 둘 수 있다. 비로소  이상의 것으로서 혹은  이상의 자리에서 를 바라볼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의 자리이자 모든 것의 자리라고 부른다.


진격의 거인이 나의 뇌리 깊숙한 곳에 박아버린 이미지는 설움의 감정인데, 그렇게 의도하고 그린 것 같지는 않지만 에르디아 민족 일반인의 거인 형상이 어느 시점에선가 그들 민족 설움의 감정이 꿈처럼 폭발한 결과인 듯 느껴진 데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런 인상 이후에는 거인이 되어 피아식별조차 하지 못하고 돌이킬 수 없는 살육에 빠지게 되는 것조차 그 모습 그대로 죽지 않는 이상 깨어날 수 없는 꿈을 꾸게 된 운명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진정 꿈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은 길게 느껴졌던 악몽에서 마침내 깨어났을 때 그간 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침 햇살이 눈꺼풀 사이를 열어 젖히며 빛을 반짝이고 이제 그만 자고 어서 일어나서 아침 먹으라는 엄마 혹은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오늘 아침 뉴스를 깔끔하게 정돈된 어조로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리고, 꼭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우주의 존재, 꼭 그렇게


아인의 마지막에서 나가이가 자신의 수많은 유령(들)―분명 삶의 어떤 순간에서 그 자신이 중얼거린 말들을 한 문장씩 맡아서 중얼거리고 있지만 그들 사이에 일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유령(들)―을 불러냄으로써 사토라는 벽을 넘어서는 장면을 지금도 계속해서 떠올리게 되는 이유 또한 여기서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그리고 너무 다른 나의 목소리 속에서 살아오고 있지 않나. 미치지 않고서야 더는 살아서 움직이기 어려운 시간을 미치지 않은 척 하나의 명백한 나 자명한 나를 훌륭하게 연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매진하면서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고 있지 않나. 그러므로 여기서부터는 나의 미쳐 있음을 미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전제로 남은 삶을 이어갈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조금 다른 테제(들)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테제라기에는 다짐처럼 뻔한 말들인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얼마든지 쓰레기 같은 글을 쓸 권리가 있는 것처럼 꼭 그렇게 권리가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무수하다. 나는 언뜻 하나의 개체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빠지기 쉬운 착각이거나 환상일 뿐이다. 나는 언제든지 앞과 뒤가 다를 수 있다. 나는 언제든지 당신을 배신할 수 있다. 의도 같은 것은 없다. 나는 언제든지 어제와 다른 말을 할 수 있고 정확히 같은 이유로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나는 논리가 없다. 나는 체계가 없다. 나는 지금 단지 있다. 단지 무수하게 있다. 이것은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의 말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고, 어설픈 거짓 약속일 뿐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말이다. 나는 여기서부터 우리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것 몇 개만을 남겨두고,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부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조금 더 재미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한동안 꿈을 꾸면 된다. 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잠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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