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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neaufgabe Sep 17. 2022

육안

호수의 이방인을 본 게 무슨 요일이었는지 그새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날부터 줄곧 육안이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호수의 이방인이 빛을 쓰는 방식에서 다소간 강박증적으로 느껴질 만큼 인공적인 조명의 사용을 제한하고 있음을 영화를 보던 어떤 순간 깨달았고 동시에 정말 오랜만에 육안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영화 바깥의 조명뿐 아니라 영화 안의 조명―이를테면 가로등이나 술집 간판 불빛 같은 스크린 내부의 조명조차 서사 안에서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고 어느 시점에서는 흐름상 약간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호수와 그 주변에 우거진 숲으로 공간적 배경을 극히 제한하여 운용하고 있구나 싶어지는데 아, 여기까지 쓰고 나니까 어쩌면 이 영화의 구조는 호수와 숲의 관찰자 시점 같은 것에서 시작되는 거였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까지는 미처 와 보지 못했었다.

배수아가 번역한 예니 에르펜베크의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도 비슷한 구조를 갖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솔직히 어떤 내용이었는지 어떤 문장들이 그 소설을 채우고 있었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지금 이 소설의 관찰자는 사실상 다른 누가 아니라 집이구나 깨닫게 되는 시점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집이라기보다는 터에 가까운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소설의 대상은 그 집에서 혹은 그 터에서 살아오고 있는 몇 세대의 인간들이 되고, 그 관찰의 시선이란 비인간의 시선을 형식화하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님 말고​


영화가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쉽고 단순하게 대답하긴 어렵겠지만 어떤 장면들이 계속해서 어른거리고 그건 모두 해 질 무렵 부지불식간에 호수와 숲이 어두워지는 순간, 자연의 빛이 저물어가면서 육안으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이 서서히 거대한 지구의 뒷면 그늘 아래 드리워지는 순간, 깜깜해진 스크린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어떤 소리들, 숲을 지나는 바람이 잎새 하나하나에 이는 마찰의 소리들과 숲속 오솔길의 나뭇가지나 낙엽 따위를 밟는 프랑크의 발소리 그리고 간간이 미셸을 애타게 부르는 프랑크의 말소리 같은 것들……​


그런데 육안이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리다가 그 말조차 결국 인간의 육안을 제한적으로 가리킬 따름이지 않나 하는 질문에 다다르면 나는 또다시 답 없는 궁리를 이어가게 된다. 영화든 시든 어떤 조형이든 그림이든 그리고 음악이든 결국 인간이라는 손바닥 안에서만 돌고 도는 것이라면 인간이 지금까지 이루어온 이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났을 때 무엇이 남을지 무엇으로 남을 수 있을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중에서도 특히 문학이란 정말이지 비좁은 우물이 아닌가…… 나는 종종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인가 가끔은 차라리 내가 만든 무엇이 그 자체로 아름답기보다 누군가가 만든 무엇에 내가 크고 작은 영감 같은 것을 나도 모르게 건넸기를 바라게 된다. 받은 사람 역시 받은 줄 모르게 소리 소문 없이 건넸기를, 중요한 일은 남은 삶을 기꺼이 추동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관계를 갖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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