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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neaufgabe Oct 01. 2022

밤에 달릴 때


밤에 달릴 때는 눈앞에서 증발하는 저녁을 쫓는 기분으로 달린다. 그렇게 열심히 저녁을 쫓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을 정말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고 거기서 조금만, 조금만 더 속력을 내면 마침내 시간을 몇 센티미터 정도는 되돌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디까지나 느낌이 그렇다는 말인데… 그렇지만 그게 진정 불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정말이지 어쩌면 가능한 방편이 하나쯤 있지 않을까… 이렇듯 해를 거듭할수록 나는 점점 더 어리석어진다.​


지난 한 달 반 정도 기간 동안 달리기를 쉬기 전까지는 이틀에 한번꼴로 달렸었다. 그때 나는 달리기를 하는 동안 그 무엇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음이 좋았는데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건 일종의 회피 행위가 아니었나 생각해보게 된다. 달리 말해 그때 나는 도망치듯 내달렸는지도 모른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닌가, 실은 잘 알고 있었나.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는지 나는 결코 모르지 않았나. 아니면 안다고 말하기도 뭐하면서 모른다고 말하기도 뭐한 약간 그런 어중간한 상태였나. 뭐 어쨌든 나는 거짓말도 거짓말이 아닌 말도 없다고 믿는 편이기는 하다.

일주일 전부터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면서는 그전과 무엇인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음에 기대어 달리지 않는다. 나는 달리면서 눈앞에서 증발하는 저녁을 쫓는 기분으로 달린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몇 센티미터 정도는 시간을 되돌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때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은 시간의 단위는 일년이나 한달처럼 또는 하루처럼 거대한 규모의 단위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아주 잠깐인, 분당 200미터 남짓의 속도로 달리는 나에게 있어 몇 센티미터 정도의 눈금에 지나지 않는 찰나의 거리이다. 쉬이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미세하게 분절되어 있는 그 일순간(들)을 스치며 나는 잠깐이나마 그 시간이자 공간을 구성하는 것들과 눈을 마주친다. 나는 달리면서 나와 같은 방향으로 혹은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강물을 보고 마찬가지로 바람을 보고 바람에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의 길게 뻗은 팔들을 본다. 또한 나는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 아스팔트 길가에 돋아난 강아지풀과 민들레 이파리 같은 것들을 보고 몇 송이 남지 않은 능소화를 보고 이따금 풀을 뜯거나 풀 위에서 뒹굴거리며 날벌레를 낚아채는 고양이를 본다. 그리고 나는 산책하는 개와 사람들을 본다. 달리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본다. 같은 방향으로든 반대 방향으로든 나는 그들을 스치며 규칙적으로 호흡하기 위해 노력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다. 나는 언제까지나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그들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달아나지 않는다. 나는 바람처럼 가볍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들을 스칠 때마다 미약하게나마 달라지는 중력을 나는 느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그들의 시간을 산다. 몇 센티미터만큼은 산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것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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