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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 Nov 09. 2022

다시 만난 흑구

몇 해 전, 흑구 문학상 시상식 참석차 포항에 간적이 있다. 세광 한흑구(黑鷗)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보리〉라는 수필을 쓴 작가라는 게 전부였다. 작품의 배경이 된 구만리 마을회관에 흑구 문학관이 꾸며져 있었다. 그를 잘 알지 못한 탓에 겉핥기식으로 지나쳐왔다. 그보다 문학회 회원들과의 일박 나들이에 더 들떠 있었다. 


책으로 다시 만난 그가 반가웠다. 생애를 걸다시피 진지한 태도로 썼다는 글을 눈으로만 훑고 지날 수 없어 목청을 가다듬었다. 수필 대부분이 자연을 소재로 한 글이다. 음풍농월을 읊지 않았을까 살짝 의심이 가기도 했지만 책이 손에 들어온 이상 찬찬하게 읽어보리라 마음먹었다. 


미국으로 건너가는 길에 배 뒤를 따르던 검은 갈매기가 조국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방랑하는 자신의 신세와 같다고 느껴 쓰게 되었다는 필명 흑구. 그는 일제 말기 사상범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그런 까닭인지 글 전체에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가 깔려 있다. 한 구절도 놓치지 않으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소리 내어 읽었다. 읽다보니 음률이 살아났다. 시의 정신으로 쓰여졌기에 시를 읽는 자세로 감상하라는 말이 이 때문이었던가. 



대표작인 〈보리〉를 읽을 때 겨울 들녘이 떠올랐다. 시린 들바람을 거스르며 전교생이 보리를 밟으러 나가곤 했다. 동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구령에 맞춰 꼭꼭 밟아도 보리는 자꾸만 일어섰다. 개구쟁이 아이들도 그곳에서는 장난을 치지 않았다. 망종 무렵이 되면 곱게 땋아 내린 머릿결 같은 보리는 누렇게 물이 들었다. 낟알을 둘러싼 기다란 수염은 갈수록 하얘졌다. 수확을 하는 농부들은 깔그러운 수염을 수건으로 연신 털어냈다. 고단한 생활까지 탈탈 털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수가 끝난 논에는 보릿대를 태우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작가는 보리의 일생이 순박하면서도 참을성 있게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농부들의 본성과 다르지 않다 했다. 그에게 자연은 단지 예찬의 대상이 아닌 생명을 지닌 것의 아름다움과 진실에 대한 찬미였다. 그는 글을 쓴다는 것은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이고, 그것은 또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 때문인지 다른 생명체와 인간이 동등한 존재라는 철학이 깔려 있다.    


문고판에는 스물 네 편의 글이 실려 있다. 백여 편의 수필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쓰인 글들이 많다. 이전이건 이후건 읽는 내내 고향들녘을 보는 것처럼 친숙하게 와 닿는다. 글의 소재가 산과 바다, 하늘과 들판, 그리고 그곳에 사는 생물들의 익숙함 때문일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통찰력과 사색의 깊이가 문장마다 시적으로 배어있어 꼭꼭 씹듯 글을 읽게 만든다. 자연물을 통해 상징과 비유로 인생을 표현해 낸 기법은 또 얼마나 창작적인가.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내고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사명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성자인 양 기도를 드린다. -                                                                                                                 보리〉 중 일부     


보리싹을 밟아주어야 뿌리내림이 좋아진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흑구는 보리를 노래하며 모진 고난을 겪었던 자신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작품들은 오월의 청보리처럼 나를 일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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