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 귀퉁이에 봄까치꽃 한 무더기 피어 있다. 저만치 서 있는 봄보다 먼저 온다해 봄까치라 했다던가. 이름처럼 꽃말도 기쁜 소식이다. 정작 밭주인인 시금치는 찬바람에 몸을 웅숭그리고 있다. 얄궂은 봄바람이 꽃잎을 건드리고 지나간다. 청보라빛 여린 잎 하나 팔랑 내려앉는다.
저리 앙증맞은 꽃을 두고 큰개불알이라니. 개똥처럼 지천에 깔려 있어 그럴까. 아니면 고운 모습에 시샘을 내서일까. 꽃이 진 후 씨방이 개의 불알과 닮아 붙여진 일본식 이름이라니, 민망하고 얄궂다.
밭은 마을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있다. 뽑자니 아깝고 두자니 입방아에 오를 일이다. 나는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지내기에 마음만 분주하다. 땀은 땀대로 흘리고 농사는 풀 농사만 짓는다더니 아무리 애를 써도 요령 없는 손놀림은 표가 나지 않는다. 돌을 고르랴, 호미질을 해대랴, 문맥도 없이 제멋대로인 밭이지만 자꾸 나앉아 있고 싶다. 그나마 초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어 다행이다. 와중에 어쩌자고 꽃은 들어오는지.
호미 자루를 놓고 차분히 꽃바라기를 하고 있는 내게 지나던 구실 할머니가 묻는다.
“뭘 하고 있어?”
꽃 보고 있다하면 퍽이나 할일도 없다할까 싶어 “시금치 캐고 풀도 매느라구요.”하니 밀고 가던 보행기를 멈춘다. 터에 쓰잘데기 없는 것 심지 말고 먹는 것만 기르라던 노인의 눈에도 봄꽃이 보였을까. 어정어정 밭을 향해 걸어온다.
큰개불알 앞에 멈춰선 노인이 “풀은 씨가 맺기 전에 뽑아 버려야 해.”라며 날쌔게 꽃 무더기를 잡아챈다. 억센 손아귀에 봄이 한 움큼 솎아져 나간다.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밭으로 나가는 노인에게 풀꽃은 제거해야할 잡초에 불과하다. 나는 아무 쓸작에도 없는 꽃을 뽑지 못하는 실속 없는 아낙이다. 구실 할머니는 한 포기의 풀도 허용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허리를 뒤로 젖히고 밭을 휘 둘러본다. 그녀는 내 밭의 권력자다.
지난 가을 도라지 씨를 뿌린 자리에도 큰개불알이 자리를 잡고 있다. 노인은 종자를 건네주며 토종은 개량종 같지 않게 볼품없고 느리게 자라지만 내년에 또 심을 수 있다 했다. 빈껍데기 같은 씨앗이 싹을 틔울까 의심이 앞섰다. 덮어놓았던 짚을 살짝 들춰보니 바늘처럼 가느다란 순이 보인다. 건드리기만 해도 꺾일 태세다. 위험에 처한 작물을 보호하려는 농부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풀은 돌보는 이 없어도 비와 햇빛, 바람소리를 들으며 잘도 자란다. 봄까치꽃이 질 때까지만 두자하면 무슨 대답이 돌아올까. 앞마당에 고추랑 상추심어 따 먹으라 일러줄 때 꽃밭을 만들었던 이력으로 농부로서의 자격 미달은 입증되었다. 나는 암말 않고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노인 곁에서 까딱까딱 풀을 뽑는 시늉만 해댔다.
풀꽃이 사라진 자리가 휑하다. 노인이 알면 기껏 손 노릇 해주었더니 헛소리 그만 하라 하겠다. 초보 농부인 내가 작은 풀꽃 한 포기에서 자연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하면 어불성설이다. 먹거리보다 화초에 마음이 가는 것은 대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싶은 마음에서일까. 이를 함께 더불어 사는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면 노인은 혀를 찰 것만 같다. 나는 내년에도 밭 귀퉁이에 꽃이 필까 생각한다.
노인은 소임을 다했다는 듯 무릎을 세우고 손을 탈탈 털어냈다. 나는 고전소설에 나오는 구실아치 이방처럼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며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농사를 짓는다고 밭에 나앉아 있는 것이 실없는 구실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노인은 나를 외면한 채 의미심장한 반입속말을 남기고 밭둑을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