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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금붕어 May 17. 2024

휴직하면 시간이 많을 줄 알았다.

매화나무야 너는 벌써 열매를 맺더라

휴직을 하면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일 뿐이라는 걸 지난 두 달 반의 시간을 보내며 다시 한번 깨닫는다. 당근에 내다 팔려고 쌓아둔 책은 아직도 현관 앞에 잔뜩 쌓여있고 브런치에는 고작 한 개의 글을 올려 작가 타이틀을 얻는 데 성공하고서 아무런 글도 쓰지 못했다.


그렇게 3월과 4월이 지나고 5월도 중반을 넘어섰다.


나에게 2024년의 봄은 참 아름다웠다. 이렇게 봄이 길었나 싶을 정도로 하루하루 달라져가는 봄이 오는 모습과 가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움직였다.


아파트 단지에 있는 매화나무에 꽃이 피었을 무렵은 그 향기로움에 취해 나도 무언가를 꽃피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설레었다. 그러다 하루하루 익숙해져 가는 휴직생활에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고 여유를 부리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그렇게 꽃들은 지고 푸른 잎이 싱그러운 5월이 되었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매화나무에 작은 초록 열매가 매달린 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매화나무는 벌써 열매를 맺었구나. 나는 그동안 무엇을 이루었지? 매화나무는 게으름도 피우지 않고 딴짓도 하지 않고 이렇게 열매를 맺기 위해 하루종일 열심히 일했는데.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한 거지?


이 글은 휴직을 결심했던 비장했던 작년의 나를 잊고 꽃향기에 취해 잠시 그 본분을 망각한 어리석고 게으른 나를 꾸짖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한 매화나무에게 바치는 글이다.


일단은 핑계로 시작해 본다. 사실은 엄청 게으름을 피운 것은 아니다. 4월에는 하지정맥류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5월은 가정의 달.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그리고 이맘때 모여있는 시부모님의 생신과 가족 행사들을 치르고 나니 이제야 좀 정신이 되돌아오는 것 같다.라고 쓰지만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을 것 같은 핑계라는 건 인정.


사실 욕심 많은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내고 싶었다. 여러 가지 일을 다 하고 싶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못한 것 같다. 한 가지 일만 집중해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운 데 이것저것 강의를 찾아 듣고 수업을 등록해서 참여했다. 좋았던 것도 있고 시간을 낭비한 것도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이라고 더 이상 핑계는 대지 말아야지. 그리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도 말아야지. 뭐든 나에게 도움이 될 시간들이 되겠지. 하지만 깨달은 것. 하나에 집중하자.


이것저것 뻘짓을 좀 하다 보니 얻은 수확도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확실해졌다는 것이다.


그동안 믿어왔던 나의 꿈이 헝클어지고 무너지고 있다. 무너지고 있는 나의 꿈을 어떻게든 붙잡고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것인가. 아직 그것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의 상상의 나래를 너무 멀리 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는데 마이너스 통장과 나의 두 아들들. 자고 있는 두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좀 더 일찍 이런 고민을 하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탓할 뿐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토록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이제라도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이토록 절실하게 오로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만 고민을 했던 시간이 있었나 싶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행복한지를. 수능, 대입, 취업, 결혼, 출산, 육아.. 그 나이대에 해야 한다고 배웠고 믿었던 일들을 숙제처럼 해왔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을 이토록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마흔이 넘어서야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지난 40여 년간의 내가 쌓여 만들어진 모습이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므로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앞으로 어떻게 더 행복하게 살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남편과 아이들이 직장으로 학교로 가고 나면 텅 빈 집 안에는 고요와 평화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평안함 속에서 불안과 초조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래도 되나, 이렇게 쉬어도 되나. 불안과 평화가 공존하는 이 시간을 건너오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하나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 인간인지 확신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그 꿈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아주 조금씩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고민도 있다. 마이너스 통장을 보면 되도록 빨리 예전의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는 조급함과 압박감이 밀려온다는 것.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


나는 과연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요즘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주문을 외운다.


반짝반짝 빛나라 내 인생.


P.S. 매화나무야 나 그냥 놀지만 않았어. 뻘짓 좀 했는데 그게 좀 게을러 보일 수도 있어. 그런데 그거 예전에 못해본 것들이라 지금 좀 해봐야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나도 곧 너처럼 열매를 맺을 거야. 진짜로. 약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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