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박두만(송강호) 1화

중력을 사랑한 시골 아재

by 시네피에
여러분이 인식하지 못했던, 연기가 품은 흥미로운 비밀.
주관적이고, 과하게 해석해드리겠습니다.




'연기, 과하게 해석하기'


"이야, 연기 진짜 기가 막힌다."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영화가 가진 분위기 때문일 수도, 배우들의 연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런 장면들을 만날 때마다 영화에 대한 재미와 감동은 더욱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특히 연기를 사랑하는 저의 눈에는 배우의 행동이나 태도, 반응들에 숨겨진 여러 비밀들이 더욱더 흥미롭게 다가오곤 합니다.


[연기, 과하게 해석하기]는 그러한 흥미로운 비밀들을 '과하게' 해석해 재미를 찾는 시도입니다.

이제, 그 여정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스트리밍을 이용해 장면을 감상하면서 읽으시면 더욱 좋습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 中


영화 '살인의 추억'의 감독 봉준호 & 배우 '송강호'

영화 '살인의 추억'은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2003년 작품입니다.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영화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항상 탄탄한 스토리를 선보여왔고, 영화 장면 속의 모든 디테일을 완벽히 갖추는 것으로 유명해 ''봉테일'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도 그러한 면모들이 장면 전체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배우 송강호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대한민국 국보 배우입니다. '넘버 3', '쉬리', '비무장지대 JSA', '괴물', '변호인', '택시운전사' 등 한국영화사를 수놓은 굵직한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고, 국내외 여러 관객들에게 찬사를 받았습니다. 제목에서 알려드렸다시피, 첫 번째 분석대상은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형사 박두만입니다.



영화 속 시골 형사 박두만

한적한 시골 마을에 전에 없던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고, 현대적 수사기법에 뒤쳐진 시골 형사 '박두만'은 범인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 과정에서 박두만은 시골형사로서 흥미로운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배우 송강호, 그리고 '박두만'의 세계로 떠나보겠습니다.




#경운기에 탄 박두만


Memories.of.Murder.2003.KOREAN.1080p.BluRay.H264.AAC-VXT.mp4_20210316_185438.200.jpg 손가락 욕을 선사하는 시골 형사 박두만

무심한 시골 아재

영화는 서정적이고 음울한 음악과 함께 출발합니다. 경운기 뒷칸에 앉아 논두렁을 지나는 박두만 뒤로, 잠자리채를 든 꼬마들이 옹기종기 따라붙습니다.

박두만은 마치 만사가 귀찮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무엇을 보고자 두리번거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두리번거릴 뿐입니다.


*아저씨가 되고 나니, 이 연기가 얼마나 사실적인 연기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뭐라든, 뭐가 눈앞에서 성가시든, 아저씨들은 볼 거 다 봅니다.


아재의 소울메이트

달달거리는 경운기가 그리 편하지만은 않은 건지, 아니면 그냥 습관인 건지, 박두만은 한 손에 담배를 들고 틈날 때마다 뻐끔거리며 '똥차, 똥차'라고 외쳐대는 아이들을 외면합니다.


*담배는 연기 상황에서나 일상에서나 매우 중요한 소품입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해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명언 탄생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물론 많은 경우 자아도취에 빠지게 만드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압축적인 행동선 1

박두만은 아이들을 무심히 바라보다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립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합니다. 마치 무엇을 줄 것처럼 상의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손가락 욕을 꺼내보입니다.


*영화 장면에서는 박두만이 담배꽁초를 버리는 행동을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프레임 밖으로 손이 벗어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꽁초를 버리는 행동과 손짓이 한 호흡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꽁초를 버리는 행위는 중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버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세 번의 호흡(꽁초 버리기-손짓하기-손가락 욕)으로 진행되었어야 할 행동을 두 번의 호흡(꽁초 버리며 손짓하기 - 손가락 욕)으로 압축해서 표현함으로써, 장면의 효율이 살아났고 아저씨들이 가진 고유의 분위기도 물씬 풍기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작은 행동들이 서서히 관객들에게 박두만의 성격을 '각인'시키고, 살아있는 인물로 느끼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압축적인 행동선 2

박두만은 목적지에 도착한 듯 경운기에서 내립니다. 그리고는 옆에 서있는 꼬마를 지나치며 머리를 한번 쓰다듬습니다.


*여기서도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는 박두만의 손목 스냅은 유니크합니다. 부드럽게 머리를 감싸 쥐는 듯하다가 유연하게 한 바퀴 머리를 훑고, 그대로 아래로 떨어집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행동에도 두 가지 동작이 압축되어있습니다. (쓰다듬는다-손을 거둔다)의 두 과정이 하나의 동작으로 유연하게 이어진 것입니다. 앞서 담배꽁초를 떨어뜨릴 때처럼 중력에 따라 손이 떨어지는 듯한 모습도 특징입니다.

[박두만은 중력에 손을 맡기는 듯한 반복된 행동 패턴을 통해 평상시 별로 긴장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카메라 앞에서 이토록 유연하게 액션을 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수구를 살펴보는 박두만


Memories.of.Murder.2003.KOREAN.1080p.BluRay.H264.AAC-VXT.mp4_20210316_185504.276.jpg 하수구 안 사체를 확인하는 박두만


햇빛과 옥에 티

박두만은 하수구 구멍 한쪽에 쪼그려 앉습니다. 그리고는 어두컴컴한 안쪽을 살펴보기 위해서 주변을 살펴 깨진 거울 조각을 발견합니다. 햇빛을 반사시켜 하수구 안쪽을 살펴보는 박두만의 눈앞에, 살인사건 피해자의 시신이 놓여있습니다. 씁쓸한 표정으로 하수구 밖으로 상체를 일으킨 박두만 옆에는, 아까 따라오던 아이들이 피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옷가지들을 흔들어대고 있습니다.


*어두운 하수구 안쪽을 비추기 위해서 거울 조각을 찾는 행동, 햇빛의 방향을 확인하며 안쪽으로 들어가는 행동에서 배우 송강호의 연기는 놀랍습니다. 보편적으로 하수구 근처에 깨진 유리조각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두만은 마치 다 안다는 듯 하수구 주변을 뒤집니다. 그래도 관객은 박두만의 행동에 대해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박두만에게서 '뭐 없나? 없음 말고'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거기에 있을 줄 알고 찾아본 것이 아니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찾았을 것이다.'라는 복합적인 캐릭터의 성격을, 앞의 짧은 장면을 통해서 이미 관객의 무의식에 인식시킨 것입니다. '저 사람이라면 뭐, '.


*사실 하수구 안의 시신을 바라보는 장면과의 연결에서는 옥에 티가 있습니다. 앞 장면에서 박두만 옆에 쪼그리고 앉은 경운기 운전수의 그림자 방향을 보면, 박두만이 거울로 햇빛을 반사한 쪽의 반대편에 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배우 송강호는 컷의 연결을 위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해를 확인하는 디테일을 보여줬습니다. 얼마나 그 연기가 자연스러운지 반복해서 돌려보면서도 옥의 티라는 사실을 알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수구 안의 시신이 화면에 등장하고 나서야, 관객은 박두만이 시신 발견 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제야 그가 앞서 보여줬던 행동들에서 묘한 '입체감'이 느껴집니다. '사체 발견 현장에 가는 사람이 저런단 말이야?'. 사체 발견을 대하는 형사의 태도 앞에서 묘한 사실감과 이질감이 발생하면서 박두만이라는 인물을 더욱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행동에 더해서 한번 더 박두만이라는 캐릭터의 퍼즐 조각이 더해되고, 점점 더 박두만이라는 인물의 퍼즐이 맞춰져 가는 것입니다.]


이다음 장면에서 황금빛 논과 파란 하늘 위로 '살인의 추억'이라는 타이틀이 나타나고,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Memories.of.Murder.2003.KOREAN.1080p.BluRay.H264.AAC-VXT.mp4_20210317_015605.571.jpg 영화 '살인의 추억' 메인타이틀

#갈무리


앞선 두 장면에서 드러나는 박두만이라는 형사의 모습을 통해서 어떤 인물인지를 매우 강렬하게 전달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각각의 장면에서 배우 송강호가 디테일한 연기를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체를 발견하러 가는 길임에도 장난을 치거나,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는 등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형사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동에서 나타나는 유연함은 성격을 뒷받침하고 있고 인물의 '일관성'도 보입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박두만은 굉장히 입체적이고 동시에 일관성 있는 인물로 각인된 것입니다. 관객은 벌써 박두만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영화 시작 이후 3분밖에 흐르지 않았다는 점, 몇 가지 작은 디테일들은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과하게 해석하기'의 여정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2]화 에서는 타이틀 샷의 다음 장면인 [#용의자 조사하는 박두만], [#논두렁의 박두만]에 앞서, 해당 장면을 이해하기 위한 간단한 '살펴보기'가 '과하게'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