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건축학회지에 실린 서평
조 항 만 Zo, Hangman
서울대 건축학과 부교수
대한건축학회지
찰리 채플린 경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이 말을 ‘내일은 초인간’ 시리즈의 소설가 김중혁의 언어로 바꾸어 본다면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속도도, 능력도, 인생도.”
이 정도일 것이다.
인간은 엄청난 수련이 없다면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인식하거나 표현하지를 못한다.
(절대적으로) 빠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 더 빠른 또 다른 것이 있는 것이고, 잘하는 것의 기준도 누구보다 더 잘하는 것이다.
공부는 서울대생 보다 잘해야 잘하는 것이고
축구는 유로파 리그에 턱걸이한 프리미어 리그 구단 토트넘 보다는 잘해야 잘하는 축에 드는 것이다.
그나마 이 기준도 저마다 제각각 이다.
“진짜 좋은 거”의 작가 오태훈은 이 책을 쓰기 전까지의 인생에서 많은 좌절을 겪었다고 토로한다.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원하고, 또 추구해야 성공이고 행복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상대적인 세상에서는 더 성공적이고 더 행복한 무언가가 항상 존재하니까.
이 때문에 고민했고 불행했다고 한다.
이 상대적인 세상에서 더 성공적이고 더 행복한 무언가를 인식하는 순간 성공은 실패가 되고 행복은 불행으로 바뀐다.
또한 인간의 정체성은 본연의 자기 자신으로 만들어진다기보다는 내가 갖은 것, 내가 아는 것, 내가 먹은 것, 내가 입은 것, 나의 지위나 직업, 나와 타인과의 관계 등, 내가 아닌 것, 즉 허상(가짜)으로만 정의되고 형성된다.
이런 가짜로 구성된 세상에서 작가는 자기 존재의 진짜 의미 찾기에 실패를 거듭하고 방황을 시작한다.
건축과 하등 관계없어 보이는 이 책을 건축학회지에 소개하는 이유는
창작의 고통에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건축가들을 위해서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신의 창조가 아닌 유에서 또 다른 유를 재 조합하는 인간의 창작을 위해서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 작가 그 자신이 창작의 출발점이자 기준점이 된다.
존재와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가의 여정과 그 과정에서 찾아낸 자신의 확고한 정의는 창작을 시작할 때 막막함과 창작 과정에서의 헤맴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도 그 자신이 건축가이다.
미국과 독일에서 공부했고, 정림, 해안 등 유수한 국내의 건축사사무소를 경험한 건축인 이자 작가인 저자의 고민은 한 건축인으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많은 이에게 여러 부분에서 깊이 공명하고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증명된 것처럼 작가는 ‘시간은 없다’라고 말한다.
‘영원’이란 시간이 없다는 것의 반증이라는 것.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체계 속에서 행복과 자유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만족은 ‘지금’이어야 하는데 시간을 믿는 인간들은 자유를 유예하고 행복을 미루어 놓기 일쑤라는 것이다.
‘(미래에) 번듯한 직장 잡고, 조그만 아파트라도 마련할 만큼 벌이가 되면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야지’라는 것이 보통의 생각이다.
수많은 ‘지금’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미래라는 것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조건이 해소되어도 또 다른 선결조건들은 수도 없이 생겨난다.
‘순간을 영원처럼’이란 말처럼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할 수 없다면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는 것’.
전적으로 동감할 수 있는 작가의 깨달음이다.
또한 자기중심적이고,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존재한다고 믿는 인간은 실은 연결된 모든 총체의 일부이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은 우리의 언어로 이루어지고 언어는 어떤 것을 총체에서 잘라내어 정의함 으로서 시작된다.
이로서 원래 이어져 있던 모든 것들의 분절이 시작된다.
작가가 예를 든 낮과 밤. 낮과 밤은 사실 잘라낼 수 없는 것이다.
이어져 있다.
어디까지가 낮이고 어디까지를 밤이라고 할 것인가? 새벽은 무엇이고 해질녘의 어슴푸레함은 무엇인가?
이렇듯 자를 수 없는 것을 언어라는 도구로 잘라내어 정의하고 인식하기 시작한 인간은 결국 ‘혼자’가 되어간다.
그들의 언어로 정의된 것은 모두 허상이고 가짜다.
나무, 돌, 파도, 구름, 좋음, 나쁨, 예쁨, 추함, 날씬함, 뚱뚱함, 모두 상대적인 것이고 허상이고 가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본질(진짜)보다는 최상의 결과를 얻기 위한 방법론만 가득한 현재의 세상을 만들어냈고 이러한 세상은 부처가 말한 고통(苦痛)의 바다(海)일 뿐이다.
어떤 전체, 총체의 일부가 아니라 분절된 ‘혼자’가 되면 어떻게든 정의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지위, 재산, 외모, 학벌, 지연, 혈연 등 진정 자기가 아닌 것들이 개입된다.
‘혼자’되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더욱 총체와의 연결, 타인과의 관계가 필요하다.
작가가 제시한 ‘진짜 좋은 거를 얻는 방법’은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먼저 가짜 세상에 있음을 알아차린다.
2. 지금 여기에서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전체가 진짜 좋은 것임을 알아차린다.
3. (잡)생각과 무의식을 멈추고 ‘몰입’한다. 있는 그대로(진짜)를 받아드린다.
여기서 몰입이란 ‘아이들이 여름날 맑고 시원한 시냇물에서 물장구치는 것’ 같은 것이다.
물, 자갈, 햇살, 나무그늘, 송사리, 반짝이는 물 비늘 등 자연과 연결되고
그 안에서 물아일체, 무아지경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몰입이다.
아이들은 몰입하기에 매일이 행복하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고정된 존재는 없고 오직 계속되는 흐름과 지속적인 생성의 과정만이 있다.
진짜 좋은 것은 이미 나를 둘러싸고 존재하고 있다.
그것을 알아차리면 된다.
알아차리기 위해 깨어있어야 하고, 깨어 있으려 항상 노력하면 된다.
‘진짜’는 좋은 것이고 그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순수한(연구에의) 몰입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다.
눈을 감아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실재하는 모든 것이 진짜다.
이것을 발견하는 것, 알아차리는 것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시냇가에서 노는 아이들처럼 되어야 한다.
언어로 분절되고 잘못 정의된 ‘나’를 버려야 한다.
‘장자의 빈 배’처럼 내가 없으면 나로 말미암는 모든 문제도 없다.
“진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라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처럼 낡은 프레임을 깨고 진정한 전체, 진짜 좋은 거를 만나자.
그리고 그것을 창작의 새로운 기준, 시작점으로 삼자.
그 안에서 열심히 몰입하고 행복하자.
이것이 작가가 10년 전의 작가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고,
지금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