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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이 뜨기 전에 Mar 23. 2023

파란, 기억여행자 11

11. 여행을 떠나보게나

나는 꿈을 꾼 것 같았다.

      

최근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것을 빼고는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회사에 가서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하루 종일 컴퓨터를 바라보며, 자판을 두드리고, 책상 위 놓인 전화를 받고, 회의를 하고,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고... 똑같았다. 내가 기억을 잃어버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난 그저 나에게 맡겨진 일만 하면 되었다. 바짝바짝 메말라 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 종일 핸드폰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스팸문자들이 종종 올 뿐이었다.      


해가 없는 아침에 나가서 해가 없는 밤에 들어왔다. 아침이 없이 두 번째 밤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그저 밤이었다. 그저.     


나는 다시 그 식당이 생각났다. 배는 그리 고프지 않았지만, 밤 9시.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가 들어서자 아주머니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마침 할아버지도 계셨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설렁탕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가 내시는 거니, 편하게 들어요.     


나는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신나게 먹었다. 아까는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먹을수록 더 먹고 싶었다.     

내가 설렁탕을 먹는 동안, 할아버지는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셨다. 할아버지는 좀 편안해 보이셨다. 자세히 보니 부엉이 느낌과 꽤 닮아 보였다. 자신과 닮은 동물과 변하는 것인가?      


청년도 기억여행을 떠나보게나.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아... 그런데, 행복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어쩌죠? 좀 걱정이 되어서요.      


청년도 알다시피, 나도 그랬지. 내가 찾은 의미는 너무 당연했어. 조금 더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야. 내가 지금 숨 쉬는 1분 1초가 평안하고, 이것이 더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게 행복인 것 같아.      


할아버지의 그 장면은 어떤 의미이셨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여쭈어보았다.      


음. 나는 어릴 적에도 한 손은 어머니, 한 손은 아버지. 이렇게 손잡아 본 기억이 거의 없어. 늘 할아버지 손을 잡고 다녔지. 부모님이 바쁘신 것도 사실이었지만, 손주와 늘 함께 하고 싶었던 할아버지의 욕심에 부모님과 함께 지낼 수 도 있었던 시간에도 할아버지와 지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아. 이것도 그 장면을 보고 생각이 났던 거야. 그 장면을 보고... 그 장면이 나의 슬픔을 넘어 또 다른 행복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딱 이런 생각이 정리가 되었어. 그래도 할아버지를 미워하지는 않아.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립고 고마우신 분이시지.      


그 뒤로는 내가 바빠져서 이제는 부모님과 함께 할 시간이 없어졌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더 느끼는 순간들의 시작이 되었던 것이지. 가끔 부모님을 원망을 하면서 나를 괴롭히는 시간들이 많이 없어졌어. 그래서 너무 편안하고 좋아. 청년도 한번 떠나보게나. 어떤 의미든 지금의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의미를 찾아 줄 거야.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어딘가로 전화를 하시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모자를 골라보라고 하셨다.


파란색 벨벳 모자가 눈에 띄었다. 처음 모자를 보았을 때, 마음에 들었던 모자였다. 지난번에는 너무 정신없는 통에 어떤 모자를 썼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시 뒤, 헐레벌떡 누군가 들어왔다. 나는 진주 씨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주머니를 쳐다보니 한쪽 눈을 찡긋하셨다.     


어, 안녕하세요? 아주머니께서 급히 오라고 해서 왔는데... 무슨 일이...     


할아버지가 얼른 대답하셨다.     


내가 저번에 같이 만나서 설렁탕 사기로 했잖아요. 마침 청년도 오고 해서, 설렁탕 한 그릇 먹으라고.      


아주머니도 얼른 상을 차리셨다.      


여자는 좀 당황스러워했지만, 식사를 맛있게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마음을 정리하신 것에 다행스러워했다.     


나는 벨벳 모자를 들고 서성였다. 그러다 모자에 적혀 있는 작은 글씨를 읽어보았다.      


이 모자를 쓰면, 진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예요. 두 눈을 부릅뜨고도 보지 못했던 것을 눈을 감아도 볼 수 있게 될 거예요. 당신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금이라도 이 순간을 맞이했으니, 1분 1초라도 행복을 알게 될 조건을 알게 된 겁니다.     


아주머니는 식사를 마친 진주 씨의 손을 잡고 나에게로 왔다. 여자는 이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아. 기억여행을 가라고요? 저의 기억여행인가요? 이분의 기억여행인가요?     


나는 어쩐 일인지 이런 말을 할 용기가 났다.     


저의 여행에 함께 해 주세요.     


진주 씨는 싫지 않은 듯 웃었다.     


왜 그리 겁이 많으신지...     


그럼 허락한 것이죠? 그럼 이제 뛰어요.      


이번에는 내가 먼저 모자를 쓰고 뛰기 시작했다. 여자를 잡아끌었다.      


잠시 만요. 저도...     


여자도 모자를 쓰고 따라 뛰기 시작했다.      


과거로 가는 문이 열리기 전 그 가이드 독수리가 보였다. 그가 말했다.     


이제 여행이 시작될 것이오.     


다시 한번 묻겠소, 당신 안에 있는 파랑새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지금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해보시겠소?     


나는 마음 한 구석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눈부신 햇살을 핑계 삼아 눈을 감으며 이렇게 말했다.      


메마른 사막 같은 지금으로 돌아오는 것보다 더 망설일 만큼 나를 갉아먹는 일이 있을까요? 한 번은 용기를 내보려 해요.     


대답이 끝나가 빛이 감쌌다.     


그런데, 파랑새?     


나를 둘러보니 다시 파란 새가 되었다. 그녀는...     


그녀도 파란 새가 되었다.      


파란 새 두 마리는 하늘을 날았다.


나에게 파랑새는 행복의 의미를 찾는 키워드였다. 이제 어떤 장면을 만나더라도 나는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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