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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델 Oct 20. 2021

2014

돌이킬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2014년

한때 나 2014년으로 타임슬립는 상상을 자주하곤 했다.


그해 4월,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같은 해 10월엔 내가 가장 좋아했던  뮤지션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나는 마치 과거로 갈 준비를 하는 타입 슬립 영화의 주인공처럼, 2014년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 비극들을 막을지, 어떤 장애물들이 예상되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써보곤 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실시간으로 뉴스를 보던 나는 텔레비전 화면에 뜬 사망자 명단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 이름을 검색해보았고,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들과 사진을 보고는 사망자 명단에 있던 이름이 나의 같은 과 동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학교를 갓 입학했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그를 처음 만났었다. 당시 우연히 내 앞자리에 있었던 그 친구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 나는 그가 하고 있던 귀걸이가 인상적이라고 생각했었다.


대학 시절 그와 자주 어울리거나 하진 않았다. 제대 후 복학해서 그 친구와 군 생활에 대한 대화를 잠깐 나누었던 것이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세월호 참사 후 하루 만에 그 친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대학 동기 몇 명과 빈소에 찾아갔다. 빈소에는 그의 부모님이 계셨다. 단원고에서 담임을 맡고 있던 동기는 학생들을 먼저 챙기고 나중에 배를 나오려다 끝내 탈출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예전에 강의를 듣던 문과대 건물에 그의 이름을 딴 강의실이 생겼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몇 달 후, ‘마왕’이라고 불리던 가수가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쓰러져 있던 며칠 동안, 나는 ‘당신의 목소리와 음악을 더 오래오래 듣고 싶으니 제발 일어나라’고 며칠 동안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10대 시절부터 그가 만든 노래를 듣고, 20대 때는 그가 진행하던 라디오를 들으면서 킥킥대곤 했었다. 그 사람은 앞으로도 쭉 나와 같이 나이 들며 인생을 얘기하고 위로의 말들과 음악을 들려줄 줄 알았다.


그가 죽고 한동안, 그의 곡들, 그가 진행하던 방송의 오디오 파일을 반복해서 듣고 다녔다. 몇 년간은 그의 기일마다 추모 모임에도 참석했다. 연말이 되어 좋아하는 뮤지션의 콘서트에 찾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이젠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나는 연말에 가고 싶은 콘서트도 없어지고 말았다.


2014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한 달 정도 여유가 있는 3월 초쯤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아마 세월호 참사 관련 자료를 잔뜩 챙긴 채로, 인천항 근처에 숙소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세월호가 어떤 스케줄로 운행이 되고 있는지 관찰한 뒤, 한 달 동안 어떤 방법으로든 그날 세월호가 출항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대학 동기를 만나서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걸 설득시키고 도움을 얻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문제가 쉽게 풀릴 수도 있고, 일이 꼬여서 그날 세월호가 출항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날 출항하는 배에 같이 타서라도 참사가 벌어지는 걸 막아야 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막는다면, 다음엔 그해 10월에 있었던 의료사고를 막는 것이 나의 두 번째 미션이었다. 사건 날짜와 경위는 뉴스로 잘 알고 있으니, 그를 미리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를 만나지 못한다면 병원 앞에 서 있다가 의료사고가 일어난 병원에 가지 못하게 하는 방법도 생각해봤다. 담당 의사에게 강력한 경고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부질없는 시나리오를 틈틈이 쓰던 와중에, 충격적인 소식이 현실에서 내게 전해졌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년 후, 누군가에게 그를 미투 가해자로 지목했다. 폭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폭로자는 고등학생 시절 그가 운영하는 음악원을 다녔는데, 한 번은 그가 자기와 아는 언니를 모텔로 유인한 후 강제로 성추행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결코 믿을 수 없었지만, 그 폭로자는 엄연히 몇 년째 자신의 계정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폭로자를 의심해야 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다. 더구나 나는 평소에 미투 폭로자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욕하지 않았던가. 말 그대로 멘붕에 빠졌고, 내가 알고 있던 그는 내 안에서 다시 한번 죽었다.


그 사람을 그리워했던 몇 년이 갑자기 허망해졌고, 다시는 예전 같은 마음으로 추억할 수 없게 되었다. 즐겨 듣던 그의 음악도 결코 예전처럼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와 함께 보냈던 나의 세월도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10월 말이 되면 여전히 추모 모임을 알리는 문자가 왔지만 아무런 답장도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2014년으로 돌아간다면 그를  살려야 한다. 아직 어떤 변명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팬들에게 자신이 혹시나 잘못된 길로 가거나 썩어가고 있다면 자신을 욕해달라던 사람이었기에, 그가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면 실컷 욕을 퍼부을 것이다. 어쩌면, 특유의 달변으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상상 속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면은 언제나 그를 살려낸 후, 그가 그 일에 대해서 입을 여는 순간이다.


4월이 되면 사람들은 여전히 2014년의 그 비극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4월 16일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세월호 추모행사가 열린다. 세월이 몇 년 지났다고 무심해졌던 나도, 그날이 되면 세월호에 타고 있다가 희생된 모든 이들, 그리고 나의 동기를 잊지 않겠다던 2014년의 다짐을 다시금 다지곤 한다. 한편, 2014년에 나를 뒤흔들었던 또 다른 비극에 대해선 나는 예전과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아직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많은 팬들이 있고, 어딘가에는 그를 기념하는 거리도 생겼다.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추모의 분위기에 동참할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그를 기억에서 지울 수도 없게 되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쩌면 영원히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여전히 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렇게 2014년은, 너무나 아프고 너무도 부조리한 해로 남아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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