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너구리는 어떻게 하루키의 소설『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되었나
이른 새벽 혹은 해 질 무렵, 언덕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의 정체가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칠지도 모르는 늑대인지 잘 분간되지 않을 때, 즉 빛과 어둠의 경계가 모호하고 불확실성이 팽배한 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도 한다. 굉장히 시적이면서도 어느새 익숙해진 표현인데,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개와 늑대의 시간’을 ‘오리너구리의 시간’이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 이건 무슨 뜬금포인가 싶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오리너구리’라는 글제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억 4천만 년 전, 물에서 육지로 올라온 고대 양서류 동물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서 진화했다. 하나는 알을 낳는 조류와 파충류, 또 다른 하나는 포유류. 그런데 포유류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동물들은 알을 낳는 유전자를 여전히 가지고 있게 되었는데, 이런 동물들을 ‘단공목’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단공목 동물들이 세계 곳곳에 널리 살고 있었지만, 다른 포유류와의 경쟁에서 점차 사라지고 현재는 오리너구리와 가시두더지, 딱 2종의 동물들만 남게 되었다. (고라파덕, 너 굉장한 희귀종이었구나….)
이 정도면 ‘개와 늑대의 시간’ 대신 ‘오리너구리의 시간’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나. 오리 같기도 하고 너구리 같기도 하고, 게다가 점차 사라질지도 모르는 희귀종이라면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그 찰나의 시간을 비유하기에도 더 적절하고. (이렇게 또 꿰맞춘다.….)
또 한 번 느끼는 바이지만, 글제가 있는 글쓰기는 참 어렵다. 적어도 내겐, 쓰고 싶은 거 막 쓰는 것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적잖이 재밌는 구석은 결국 내가 쓰고 싶은 걸 쓰기 위해 글제를 요리조리 (물론 억지스럽지만) 몰아가는 내 사고 과정을 관망하는 일이다. 사실 난 오리너구리가 아니라, 최근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소설은 ‘바깥 세계’와 ‘벽 안 도시’의 이야기를 넘나든다. 주인공 ‘나’는 어떤 연유에서 양쪽을 오가게 되는데, ‘벽 안 도시’는 실로 기묘하다. 바늘 없는 시계탑(그래서 시각을 알 수 없다), 그림자 없는 사람들(그림자를 떼어내야만 도시로 들어갈 수 있다), 뿔피리 부는 문지기가 감시하고 불확실한 벽으로 외부와 차단된 곳, 사람 외 생명체라고는 단각수(單角獸)들만 존재하는 곳, 책 대신 오래된 꿈들이 즐비한 도서관, 극히 최소한의 것들로만 이루어진 삶. ‘벽 안 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세계다. 어떻게 갈 수 있는지, 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
‘바깥 세계’로 돌아온 ‘나’는 ‘일시적인 육체를 동반한 의식으로서의 존재(쉽게 말해 유령), 고야스 씨’와 도서관에서 광적으로 책만 읽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만나며 이곳과 저곳, 본체와 그림자의 관계 등에 대해 혼란을 거듭한다.
“가끔 저 자신을 알 수 없어집니다.”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혹은 잃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 인생을 저 자신으로, 저의 본체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그저 그림자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 때면 제가 그저 나 자신의 겉모습만 흉내내서, 교묘하게 나인 척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집니다.”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고야스 씨가 나지막이 말했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 (451쪽)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684쪽)
나는 말했다. “하지만 설령 내가 이곳을 떠나고 싶다 한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높은 벽에 엄중히 둘러싸인 이 도시에서 나가기란 결코 간단하지 않을 텐데.”
“마음으로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소년은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고했다. “이 방의 이 작은 촛불이 꺼지기 전에 마음으로 그렇게 원하고, 그대로 단숨에 불을 끄면 돼요. 힘차게 한 번 불어서. 그러면 다음 순간, 당신은 이미 바깥세계로 이동해 있을 겁니다. 간단해요. 당신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습니다. 높은 벽도 당신 마음의 날갯짓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처럼 굳이 그 웅덩이까지 찾아가 몸을 던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분신이 그 용감한 낙하를 바깥세계에서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으면 됩니다.” (754쪽)
개와 늑대, 오리너구리, 바깥 세계와 벽 안 도시, 본체와 그림자, 현실과 비현실, 결국 모든 것은 경계에 관한 이야기로 환원된다. 경계에 있는 존재들, 혹은 경계 없는 것들,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어떤 시점들…. 조류든, 포유류든, 단공목이든, 어차피 태초의 근원은 하나이고 생명체 분류 작업이란 것도 어쩌면 인간의 자의적인 행위에 불과하듯이, ‘믿는 마음’과 ‘마음의 날갯짓’은 이곳과 저곳 사이에 놓인 견고한 벽을 불확실하게 만들어 버린다. 어슴푸레한 세계, 모호함만이 가질 수 있는 기묘한 아름다움 역시 바로 경계에 있지 않나. 작가 후기에서 하루키는 말한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고.
‘바깥 세계’의 질서에서 배제된 채 고립된 삶을 살아가던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나’의 뒤를 이어 ‘벽 안 도시’에서 ‘꿈 읽는 이’로 살게 된다. 그의 말로 다소(아니 많이) 이 억지스런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천천히 생각하세요. 아시다시피 이곳에는 생각할 시간이 많으니까요.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여기에는 시간이 무한히 있습니다.”
바늘 없는 시계탑의 시간, 안과 밖 또는 본체와 그림자의 구분이 무용해지는 순간, 혹은 이도저도 아닌, 그래서 이도저도 되는 그 모든 여지의 순간을 ‘오리너구리의 시간’이라고 부르면, 아무튼 어색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