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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일걸즈 Nov 09. 2020

나를 살린 당신

Part 1. 레벨 1의 여행자


바라나시는 마법 같은 도시라고 했다. 영어학원에서 친해진 강사 브라이언은 바라나시에서 보낸 황홀한 시간에 대해서 줄줄이 말했다. 꽤 과묵한 사람이었는데 바라나시의 추억을 이야기할 땐 입이 쉬지 않았다. 브라이언뿐만 아니라, 인도 여행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카페에서도 바라나시에서 자아를 찾았다느니, 영영 떠나고 싶지 않은 곳이라느니, 모두 입이 마르게 바라나시를 예찬했다.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에서 나는 조용히 들떠 있었다. 다른 이들처럼 나도 바라나시에서 자아라는 걸 찾게 되지 않을까, 그곳에 홀딱 반해버리진 않을까….


우리는 바라나시에서 5일, 길면 일주일 정도 머무르기로 했다. 막 도착한 첫날, 랑과 나는 갠지스강이 훤히 보이는 이탈리아 음식점에 들어갔다. 신선한 루꼴라가 올라간 피자와 고소한 모짜렐라 치즈가 곁들여진 카프레제를 시키고 갠지스강 위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자금이 빠듯한 여행자인 우리는 매번 저렴한 식당에 들어가 배를 채웠지만, 바라나시에 온 첫날을 기념하기 위해 나름 만찬을 즐긴 것이었다. 해가 지자 강 앞에서 뿌자 의식이 시작되었다.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소년부터 건장한 남자 대여섯 명이 단상 위에서 타오르는 촛대를 들고 몸을 움직였다. 그들의 동작이 꼭 신께 바치는 춤 같았는데 어쩐지 그 몸짓이 야릇해서 우리는 홀린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첫날이 바라나시에서 또렷하게 기억하는 유일한 날이다. 그 뒤로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는 건지, 잊으려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성지윤



그의 침대 안에서 마사지는 시작됐다. 시작은 지금껏 받아 온 마사지와 다름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손을 뻗어 나갔다. 몸이 점점 굳어갔다. 이젠 정말 안 된다고 몸이 소리를 지르는 듯했다. 모든 걸 멈추고 싶었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나를 의심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라는 말만 되뇌었다. 머리로는 단순한 마사지였다고 믿어보려 했지만 몸의 반응은 그렇지 못했다. 바로 위층에 머무는 그가 밤중에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쩌나, 잠든 사이에 침대로 불쑥 들어오진 않을까. 온갖 상황들이 머릿속에서 벌어졌다. 그는 이미 내가 어느 방에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여러 명이 같이 쓰는 방이어서 문을 잠글 수도 없었다. 밤새 방문이 여닫히는 소리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샤워할 때마다 거울에 비춰 보이는 내 몸이 싫었다. 그의 손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몸이 오염된 것 같았다. 누군가 자신의 몸이 밉다고 말할 때, 나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스스로 미워하지 말라"라고 조금 쉽게 말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겪고 나자 과거의 내가 우스웠다. 그들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 텐데. 

마사지할 때 발랐던 코코넛 오일이 잠옷 바지와 속옷까지 눌어붙어있었다. 온갖 곳에 베어버린 오일의 냄새를 맡으면 토할 것 같았다. 온몸에서 진동하는 냄새를 지우려 샤워볼로 벅벅 문질렀다. 거품 사이로 벌게진 다리가 보였다. 미안한 마음이 울컥 올라왔다. 아직 나도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는데. 내 손으로도 어루만져주지 않은 몸인데. 낯선 누군가의 손이 나보다 먼저 내 몸 곳곳에 닿았다는 게 분했다. 그 감정은 수치심보단 분노에 가까웠다.

 “너희가 아무리 조심해도 작정한 사람에겐 못 당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야.”

나의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는 말했다. 우리가 아무리 조심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것이 슬프게 화가 난다. 여행하는 동안 나는 벌판에 혼자 남겨진 초식동물처럼 온 감각을 곤두세웠다. 나는 그날, 다만 그의 호의에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린 것뿐인데. 분노는 이내 슬픔이 되어 휘청거렸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기분은 나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집’이라는 단어만 봐도 몸이 떨렸다. 나를 헤칠 거라는 일말의 의심도 들지 않는 사람들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성지윤


다음 날 아침, 나와 랑은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들과 일출을 보러 강가로 나갔다. 바라나시의 회색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강 앞에선 뿌자 의식이 한창이었다. 힌디어로 된 노랫말이 귓가에 앵앵 울렸다. 그의 눈빛과 손이 눈앞에 나타나고 사라졌다. 그의 말대로 ‘단순한 마사지에 불과한’ 가벼운 일이었다면 나는 왜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걸까. 그의 눈과 손이 잔상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나는 몸이 느끼는 불안을 믿기로 했다.

잠이 덜 깬 얼굴로 강가를 바라보던 랑을 불렀다. 어젯밤 일의 한 토막을 내뱉자, 막혔던 수챗구멍이 뚫리듯 눈물이 줄줄 흘렀다. 랑의 얼굴에선 잠 기운이 사라졌다.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화가 난 것도 같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랑은 두르고 있던 숄에서 팔을 꺼내 나의 어깨를 감쌌다. 나는 ‘만약’으로 시작하는 문장들을 읊조렸다.

 “만약,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던 말을 더 새겨들었다면, 경계심을 낮추지 않았더라면, 그날 밤 너와 함께 갔더라면, 그 사람의 기운이 좋지 않다는 너의 말을 믿었더라면….”

나의 말을 비집고 랑이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나의 잘못이 아니란 걸 모르진 않았지만 ‘내가 그랬더라면’ 혹은 ‘그러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은 오래된 쓰레기 더미에서 나는 악취처럼 스멀스멀 올라왔다. 랑은 계속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메이는 내 옆 침대를 쓰던, 중국에서 온 친구였다. 메이를 처음 본 건 다른 여행자들과 둘러앉아 영어로 대화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메이는 몸에 힘을 주지 않고도 유창하게 을 주고받았다. 영어로 말할 때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나와는 달라 보였다. 메이는 무리 지어 다니지 않고, 아침 일찍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가 해가 뜨거워질 때쯤 다시 호스텔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간단히 과일을 먹거나 인도식 봉지 라면을 끓여 먹었다. 해가 지면 옥상에 올라가 요가 수련을 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새로운 사람, 공간, 음식…. 생경한 모든 것을 맛보느라 정신없는 나와 다르게 메이는 자신의 적정선을 아는 사람 같았다.


메이는 어떤 말과 표정도 보태지 않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메이가 나와 비슷한 나이일 때, 그도 인도에서 똑같은 일을 겪었다고 했다. 그때 그 남자도 마사지 테라피를 해주겠다며 다가왔다고 했다. 그래서 메이는 지금 나의 감정이 어떤지 이해한다고 했다. 그는 짧게 위로한 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 남자를 내쫓아 달라고 호스텔 매니저한테 말하자. 매니저랑 말이 안 통하면 사장한테 직접 연락해서 말해보자. 내 친구가 호스텔 사장이랑 친하거든. 그래도 일이 안 풀린다면 경찰에게 신고하는 방법이 있어. 네가 경찰에게 영어로 말하기 어려우면 내가 대신 말해 줄 수도 있어.”

메이 덕분에 이 상황이 명료해졌다. 그 남자는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이고, 내가 느끼는 불안함은 틀린 감정이 아니라는 것. 메이가 아니었다면 호스텔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난 멍청하게 웃으며 인사했을지도 모른다. 메이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넌 혼자가 아니야. 항상 네 옆에 있을게.”


매니저는 그와 비슷한 나이의 젊은 남자였다. 매니저에게 가기 전, 걱정이 앞섰다. “그러게 왜 그를 따라갔느냐”며 나를 탓하진 않을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너덜너덜한 상태여서 작은 가시 같은 말도 나를 쉽게 후벼 팔 수 있었다. 매니저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당장 그에게 나가 달라고 요구하겠다고 했다. 매니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이곳에서 안전할 권리가 있어.”


남자가 떠나고 하루 뒤, 호스텔의 사장이 왔다. 그의 이름은 아티카. 젊은 인도 여성이었다. 아티카가 입고 있던 사리는 거리에서 흔히 보던 사리와 달랐다. 바지와 상의로 나뉘어 활동하기 편하도록 만들어진 현대식 사리였다. 아티카는 발로 땅을 쿵쿵 짓밟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벌써 내쫓으면 어떡해. 내가 있었다면 먼지 나게 팬 다음 내쫓았을 텐데!”

그의 호탕함이 고마워 코끝이 찡해졌다. 아티카는 그 뒤로도 여러 번 호스텔에 찾아왔다. 그때마다 메이와 같이 나의 안부를 물었다. 우리가 바라나시에서 그를 다시 마주칠까 두렵다고 털어놓자 아티카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이미 호스텔 운영자 커뮤니티에 걔 신상 다 뿌렸어. 성추행범이라고. 투숙객으로 받지 말라고 말해놨어.”

 

남자는 호스텔에서 내쫓겼고 그의 바라나시 여행은 순탄치 않게 되었다. 든든한 이들 덕에 모든 일은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하지만 정작 깊숙이 쓰다듬는 위로를 한 건 한국에 있는 친구 S의 한 마디였다.

 “일이 잘 끝났다고 해도 네가 힘들면 잘 끝난 게 아니야.”

메이와 아티카가 안부를 물을 때 나는 “괜찮다”라고 말했다. 그건 반사적으로 나오는 말에 가까웠다. 실은 오랫동안 괜찮지 않을 것이었다. 나와 비슷한 일을 겪었던 S는 이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지금 네 옆에 있었다면 꼭 안아줄 텐데.”

참았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덩달아 S도 울먹였다. 호스텔 계단에 쭈그려 앉아 핸드폰을 꼭 쥐었다. 핸드폰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울었다. S는 나를 위해, 나는 S를 위해 울었다.  


시간이 지나고 랑이 물었다. 그때 어떻게 다른 사람한테 알릴 생각을 했느냐고. 

나는 그저 누군가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스쳐 가는 남자의 두꺼운 손을 보면 식은땀이 나는 일이 없었으면, 거울에 비춰 보이는 몸이 오염된 것처럼 여기는 일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바라나시로 향하는 기차에서 <일간 이슬아> 정혜윤 피디의 인터뷰를 노트에 적어가며 읽었다. 어쩌면 정혜윤 피디의 말이 힘을 실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연대는, 온갖 가지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이유로 어떤 고통을 겪어냈던 사람이,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사람은 덜 겪도록 모든 것을 최대한 알려주는 것이더라고요. ‘너는 나보다 덜  힘들었으면 해. 그러니 내가 겪은 모든 걸 알려줄게.’ 이게 연대예요.”


언젠가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이를 만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그의 옆에 있을 것이다. 랑, 메이, 아티카, 매니저, 그리고 S가 그랬던 것처럼.


©성지윤

나는 어떤 다짐을 하며 글을 마무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짐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란 걸 안다. 타인의 믿음을 소중한 줄 모르고 저버리는 사람, 누군가의 일상을 쉽게 무너뜨리는 사람. 반성하고, 다짐하고, 성장해야 할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다. 그날의 일은 그에게 마사지를 받지 않았더라면- 이 아니라, 그가 나를 존중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글, 사진 성지윤(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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