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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일걸즈 Dec 12. 2020

바닷마을 다이어리

Part 2. 외톨이 어드벤처

어떻게 해야 더 시원하게 있을 수 있을까. 힘없이 돌아가는 선풍기를 이리저리 꺾으며 각도를 조절했다. 늘 그렇듯 한국의 여름은 숨이 턱턱 막히는 공기를 뿜어댔다. 검정고시 기출문제집은 펼쳐놨지만 집중력은 이미 땀과 함께 증발된 지 오래였다. 쥐고 있던 핸드폰 화면으로 알림 창이 떴다. 엄마는 친구들과 회비를 모아 일 년에 한 번씩 해외여행을 가곤 하는데 그 해에는 동유럽 발칸반도 투어라고 했던가. 여행을 떠난 엄마는 종종 가족 메세지방에 사진을 보냈다. 카페에서 커피잔을 들고 찍은 사진 한 컷, 웅장한 건물을 배경으로 서 있는 사진 한 컷. 그런데 그날 엄마가 보낸 사진에는 서 있는 엄마도 없었고, 예쁜 건물도 없이 푸른색만 가득했다. 선명하지 않은 사진 너머로 바다와 큰 바위, 그 위에서 다이빙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풍덩- 물소리가 잠깐 울리더니 이내 사라졌다. “크로아티아의 바다~ 아드리안 해~” 엄마는 사진 아래 덧붙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엄마는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라는 도시에서 산 엽서 두 장을 건넸다. 빨간 지붕의 집들이 해안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림엽서였다. 나는 자주 보는 거울 옆에 엽서를 붙여놓고 볼 때마다 언젠가 가리라 다짐했다.


# 0.

세르비아에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도에서부터 세르비아까지 모두 바다와는 먼, 내륙을 여행하다 보니 날이 더워질수록 수영이 절실해졌다. 몇 개월 동안 몸을 담가본 물이라곤 기껏해야 손만 적신 갠지스강과 물이끼가 잔뜩 껴있던 인도의 수영장이 전부였다. 심지어 인도에서나 세르비아에서나 긴치마, 긴 바지, 기껏해야 반팔만 입고 지냈다. 이러다간 등에서 버섯이 자랄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홀딱 벗고 내리쬐는 태양 아래 몸을 지지면서 푸른 바다에서 헤엄치고 싶었다. 지도 앱을 열어 세르비아 주변 바다와 가까운 나라를 찾았다. 화면을 쓱쓱 넘기던 그때, Croatia. 일곱 글자가 눈에 띄었다. 세르비아의 수도에서 두브로브니크는 서울에서 부산 정도의 거리였다. 엽서만 보며 언젠가 가겠다던 그 다짐이 이렇게 빨리, 일 년 만에 실현될 줄이야. 1일 1수영을 꿈꾸며 태양과 바다의 나라, 크로아티아로 떠났다.

세르비아에서 보스니아로, 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까지 버스를 타고 총 두 개의 국경선을 넘었다.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 때문에 눈을 살짝 떴을 때, 창밖으로 무언가 반짝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푸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버스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바다와 점점 가까워지더니 멀리서 빨간 지붕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거울 앞에 붙여둔 엽서 속 풍경이 그대로 눈앞에 있었다.

©성지윤

# 1.

드디어 갇혀있던 피부를 햇빛에 실컷 구웠다. 솜털 하나하나 소독되는 기분이었다. 바위 위에서 햇볕을 쬐다가 더워지면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지중해는 신기한 바다였다. 물의 온도가 차갑지 않아서 물속에 오래 있어도 춥지 않았다. 게다가 염분이 높아서 물에서도 몸이 쉽게 떠올랐다. 힘을 풀면 저절로 몸이 떠서,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처럼 편안했다. 숙소 앞 마트에서 산 어린이용 물안경을 쓰고 물속 이곳저곳을 헤엄쳤다. 깊이 들어갈수록 물의 빛깔도 짙은 푸른색이 되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면 빛에 일렁이는 물결이 보이기도 했다. 해가 저무는 시간에 물속에서 바라본 물빛은 잊히지 않는다. 태양이 숨을 죽이고 산 너머로 질 때, 파도 위로 산산이 부서지던 주황빛. 그 순간  영화 <그랑블루>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물속 세계를 사랑해서 물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 하던 그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종일 바다에 있다가 돌아온 날에는 침대에 누우면 몸이 물속에 떠 있는 것처럼 일렁였다.

두브로브니크는 곳곳에 해변이 있었다. 흔히 생각하는 넓은 모래사장이 있는 해변도 있었지만 바위에서 물로 들어가는 사다리 하나 놓여 있는 곳도 있었다. 아스팔트 도로 바로 옆에서도 수영복만 입고 바위에 누워있는 사람이 많았다. 노을이 유명한 스팟에는 동네 주민들이 일과를 마치고 찾아오기도 했다. 이곳 사람들은 목욕탕에 가듯이 바다에 가는 것 같았다.

해변이 이렇게 많은데 누드비치 하나 없을까, 가이드북을 뒤적이다 외딴섬에 있는 누드비치를 찾아냈다.

소나무 그늘 밑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노부부가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그곳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후다닥 눈을 거두고 옆 바위에 천을 깔았다. 자리 잡은 바위 너머에는 노부부 한 팀이 더 있었다. 그들도 역시 맨 몸이었다.

마침내 귀찮던 브라렛을 벗을 수 있었다. 물속에서 팔을 쭉쭉 뻗었다. 피부 사이사이로 바닷물이 스쳐 갔다. 브라 속에 갇혀있던 두 찌찌를 내놓고 뜨거운 햇빛을 쐬어주자, 온기가 따뜻하게 스몄다. 그제야 숨을 쉬는 듯했다. 내 몸이 가장 편안해지는 순간을 알아가고 있었다.

©성지윤

# 2.

게스트하우스는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대부분 게스트하우스에는 투숙객이 쓸 수 있는 공용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여행자들은 식비를 아끼기 위해 요리를 해 먹곤 하는데 국제 학생 기숙사를 쓴다면 이런 기분일까.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면서 지켜본 바로는 유럽이나 영국, 호주에서 온 친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파스타를 해 먹었다. 한국으로 치면 라면을 끓여 먹는 것과 비슷한 걸까. 좋은 냄새가 나서 메뉴를 물어보면 머쓱해하며 답했다. “또 파스타지 뭐.”

재밌는 건, 모두 자기만의 파스타 레시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라면에 콩나물 넣는 사람, 다진 마늘 넣는 사람이 있듯이 그들도 그랬다. 길쭉한 펜네 파스타에 라비올리 소스를 뿌리고 그 위에 브로콜리를 잔뜩 곁들여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늘을 볶아 기름을 낸 뒤, 쥬키니와 양파를 가득 볶아 넣어 먹는 사람도 있었다.

두브로브니크를 잠시 떠나 근처 섬에 갔을 때였다. 호스텔에서 만난 안나는 요가를 좋아하고 채식을 하는 친구였다. 하루는 안나가 비건 볼로네제를 만들겠다며 부엌에 들어왔다. 볼로네제는 다진 고기가 잔뜩 들어간 파스타인데 안나는 고기 대신 렌틸콩과 양송이버섯을 가득 넣었다. 렌틸콩은 포만감이 어마어마해서 배가 금세 불렀다.

중국에서 온 여행자들은 간장과 고기를 넣은 채소볶음을 자주 해 먹었다. 그 냄새가 한국의 양념갈비 냄새와 비슷해서, 그 친구들이 요리할 때마다 한국 음식이 더 그리워지곤 했다. 대대손손 내려오는 간장이라며 오백 미리 생수통에 간장을 담아온 남자애도 있었다.

저녁 8시가 넘어가고 있었는데도 늦은 저녁을 해 먹는 이들이 많아 주방이 북적였다. 조리도구도 조금씩 모자란 상태였다. 나는 며칠 전에 사다 놓은 생선이 상하기 직전이어서 얼른 구워버리자는 생각으로 팬을 꺼내 생선을 굽기 시작했다. 그때 어떤 남자애가 다가오더니 팬을 같이 써도 되겠냐고 물었다. 정확히는 팬을 ‘공유’ 해도 괜찮겠냐(Can I share the pan with you?)고 물었다. 팬을 공유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 이해가 안 됐지만 뭐 안 좋은 거겠나 싶어 오케이 했다. 그러자 생선을 굽고 있던 팬에 자기가 썰어 놓은 파프리카를 쏟아부었다. 말 그대로 ‘팬 쉐어링’이었다. 팬이 모자랄 때 친구들이랑 이런 식으로 한 팬에 각자 재료를 넣고 같이 쓴다고 했다. 내가 굽던 생선 때문에 비린내가 파프리카에 배어도 괜찮으냐 물었더니, 그 애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파프리카에 생선 냄새도 스미고 좋지 뭐. 생선은 건강한 음식이니까!”

덕분에 나도 맛이 갈 뻔한 생선의 비린내를 파프리카가 잡아줬고, 파프리카 향이 돌아 맛나게 먹었다.

마트나 시장에서 사 온 재료는 자주 먹을 때를 놓쳐 신선함을 잃었다. 자기가 만든 요리를 같이 먹자며 나눠주는 이들 덕에 요리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점심때나 저녁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게스트하우스 전체에 마늘 볶는 냄새와 토마토소스 끓이는 냄새가 퍼진다. 주방을 같이 쓰니, 자연스럽게 “너 뭐 만들어?”로 시작해서 “얼마나 여행 중이야?”라고 물으며 자연스레 대화하게 된다. 호스텔의 공용 부엌은 국제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인 거다!


# 3.

두브로브니크는  미국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촬영 배경지이기도 했고, 도시를 감싸는 아드리안 해가 아름다워 신혼여행으로도 오기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길에는 럭셔리한 레스토랑만 줄지어 있었다. 나 같은 여행자가 들어가기엔 가격 문턱이 너무 높았다. 화려한 옷을 입고 와인과 레몬즙을 뿌린 굴을 먹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내 신세가 꼭 성냥팔이 소녀가 된 것 같았다. 굴이라면 한국에서 실컷 먹을 수 있는데다 내 방 옷장에도 예쁜 드레스 많은데... 괜히 입만 삐죽이고 레스토랑을 지나왔다. 문제는 높은 마트 물가와 숙박비였다. 크로아티아의 다른 도시보다 1.5배는 비싼 물가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을 이렇게 쉽게 떠날 수는 없었다. 그때 마침 묵고 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친구들이 전해주길, 여기서 일하며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나는 곧장 호스텔 매니저를 찾아가 일하고 싶다고, 일 시켜달라고 무작정 말했다. 매니저는 조금 고민하더니 나에게 그래픽 디자인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머릿속에서 학교 수업에서 책 디자인을 했던 기억이 스쳐 갔다. 나는 할 수 있다고 했다.

사실 디자인은 수업이라 겨우 하는 정도였지 취미에도 끼지 않는 분야였다. 그런 내가 크로아티아에서 게스트하우스 로고를 만들다니.

예상했던 것보다 로고를 만드는 일은 품이 많이 들었다. 게스트하우스의 공용공간인 커먼그라운드에만 와이파이가 있는 바람에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커먼그라운드의 한 가운데에서 노트북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괜히 잘할 자신도 없는 걸 냉큼 하겠다고 말해서 이 고생을 하는 내가 한심했다. 누군가 못하는 게 뭐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못하는 게 없는 게 아니라 안 하려고 하는 게 없다고 말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친구가 슥 웃으며 말했다.

“때로는 네가 할 수 없는 일은 거절하는 게 서로를 위한 일이기도 해.”

백번 천번 맞는 말이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솔직하게 말했다면 나도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호스텔 쪽도 디자이너를 고용해서 더 멋진 로고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질러 놓은 일을 내팽개칠 수 있나, 디자인 강좌를 찾아보고 손목이 부서질 듯 마우스를 움직여 로고를 만들었다.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인 안나의 얼굴을 캐릭터처럼 그린 뒤, 테두리에 안나의 별명을 따 ‘Anchi Guest house'를 써넣었다. 그렇게 열흘을 꼬박하다 보니 어느새 로로가 완성이 되었다. 다행히도 매니저는 마음에 들어 했다. 어찌 됐건 약속은 지킨 셈이었다. 푸른 바다를 코앞에 두고 노트북만 들여다보는 건 괴로웠지만 막상 끝내고 나니 뿌듯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는 동안 1층에 별채처럼 있는 방에서 자고 일어났다. 그곳은 게스트하우스의 사장이 버스 기사들을 위해 무료로 내어주는 곳이었다. 야간운행을 하고 온 버스 기사들은 아침 8시쯤에 오는데, 그 전에 일어나서 방을 치우고 침대 커버를 새 걸로 바꿔놓기만 하면 되었다. 게스트하우스의 하루 숙박비가 이 만 원이라는 걸 고려했을 때 숙박비만 20만 원 정도 아꼈다.

다음 여행지인 암스테르담으로 떠나는 날이 다가오자, 매니저는 음식과 방, 여분의 돈까지 줄 테니 여기서 더 머물며 디자인 일을 해줄 수 없겠냐며 나를 붙잡았다. 디자인 작업을 좋아하고 탁월한 재능을 가진 친구들이 떠올랐다. 얘들아 노트북 챙겨서 한국을 떠나렴. 너희라면 어디든 반겨줄 거야.


# 4.

바버라는 이제 막 혼자 여행을 시작한 나에게 단비 같은 친구였다. 웃음소리가 통쾌한 그녀는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오른쪽 팔에는 독수리로 변하는 자신의 얼굴이 타투로 새겨져 있었다. 바버라가 바로 위에서 말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한다던 여행자다.

칠레에서 온 바버라는 자기 허리춤까지 오는 트렁크를 끌고 다녔는데, 그 안에는 굽이 뾰족한 하이힐과 짧은 원피스가 종류별로 있었다. 챙이 넓은 바캉스룩 모자와 선글라스도 들어있었다. 긴 여행을 떠나는데 짧은 원피스와 하이힐이라니. 낡은 티셔츠와 헐렁한 바지, 책 몇 권으로 꽉 찬 나의 배낭을 떠올렸다. 바버라는 자기도 이렇게 오래 여행할 줄은 몰라서 짐이 이렇다고 말했다.

바버라는 회사로부터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았다. 예상치 못하게 실직자가 된 바버라는 월세와 식비, 핸드폰 통신비를 내는 것에 퇴직금을 축내고 싶지 않았다. 이왕 주어진 돈 멋들어지게 쓰고 싶었다. 3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칠레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던 바버라는 이때다 싶어, 곧장 비행기 티켓을 끊어 칠레를 떠났다.

바버라는 영화 <맘마미아!>의 광팬이었는데, 칠레를 떠나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이 <맘마미아!>의 촬영지인 그리스였다. 영화를 보며 꿈꿔왔던 파아란 지중해 바다가 있는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 이야기도 말해주었다. 그리스를 떠난 뒤에도 바버라는 지구 곳곳에 친구를 만들었다.

떠난 날로부터 일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바버라는 여전히 칠레로 돌아갈 계획이 없다.

내가 살아 본 적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 두려워하는 어떤 것을 쉽게 허물어 버리는 사람. 바버라는 사람을 만나는 일을 "Accepting universe", 우주를 만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한 사람이 오는 건 하나의 세계가 오는 거라는 말을 기억한다. 우리는 각자의 세상에서 살다가 여행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만났다.

# 5.

두브로브니크에 있는 동안 묵었던 ‘안치 게스트하우스’는 가족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안치는 사장인 안나의 별명이었다. 안나는 은은한 노랑머리에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는 모두가 안치를 친한 이모나 할머니로 생각하는 듯했다. 매니저는 안나의 아들인 요십이 맡아서 하고 있었다. 190센티는 족히 되는 키에 큰 덩치를 가졌지만 아직 어린 남자애 얼굴이 남아있는 친구였다. 그래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데에는 능숙해 보였다.

 그들은 나를 한시도 외롭지 않게 해 주었다. 저녁때가 되면 나를 불러 같이 밥을 먹었다. 요리는 청소부로 일하던 마리아가 도맡아 했다. 하루는 마리아가 닭요리를 해줬는데, 한국의 닭볶음탕과 아주 비슷한 맛이어서 마음으로 울면서 먹기도 했다. 일과를 마치면 마리아와 안치, 요십, 바버라와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두브로브니크를 떠나는 날, 요십은 공항까지 차로 태워주겠다고 했다. 커다란 배낭을 트렁크에 싣고 조수석에 앉았다. 요십은 라디오를 켜고 채널을 돌리다가 이내 멈췄다. 박자가 빠르고 요란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이게 크로아티아식 음악이야.”

한국의 트로트 같기도 하고 락 음악 같기도 한 노래였다. 요십은 양쪽 창문을 활짝 내리더니 음악 소리를 더 크게 틀었다. 귀청이 따가 울만큼 큰 볼륨이었지만 그게 좋았다. 창밖으로 처음 오면서 보았던 두브로브니크의 풍경이 보였다. 빨갛게 수놓아진 도시, 끝이 안 보이는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올 때는 혼자였으나 떠날 땐 혼자가 아닌 이 순간이 벅찼다. 공항에 도착해 작별 인사를 할 때, 요십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커다란 요십의 품에서 다음 여정으로 나아갈 에너지가 채워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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