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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일걸즈 Dec 14. 2020

유랑 인 더 원더랜드 上

Part 2. 외톨이 어드벤처

2019년 7월 12일 저녁 여덞 시경, 나는 초록색 낡은 문 앞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었다. 불가리아의 뜨겁게 쏘는 태양(여름의 동유럽은 밤 열시 가까이 되어야 어둑해진다.)이 정수리를 달궜으나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쉬지 않고 울다 보니 내 울음소리가 먼 발치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건 여섯 살 무렵 아빠가 꽹과리 채를 들고 내 손바닥을 때리기 직전, 무서워 울던 목소리와 흡사했다. 당황스러움과 답답함이 한데 뭉쳐 몸이 빵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이리저리로 달리면서 꺼이꺼이 울거나 한 자리에서 방방 뛰며 엉엉 울기를 반복했다. 낯선 인기척을 느낀 강아지들이 집 안에서 마구 짖다가도, 내 울음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보다 커지자 이내 잠잠해졌다.

나는 어쩌다 불가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까지 굴러와 때 아닌 오열을 하게 되었을까. 이 원정의 시작점을 보기 위해서는 약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6일 전

기차 창 밖으로 벨리카 플라나의 풍경이 차츰차츰 사라졌다. 역무원에게 건넨 기차 티켓엔 Niš라는 알파벳이 찍혀있었다. 막 세르비아 니슈에서 묵게 될 카우치서핑* 호스트에게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남긴 참이었다.

여행이 제2막으로 접어들며 돈 때문에 포기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때로는 아침밥이거나 오후의 초콜릿 따위였고,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온종일 걷는 날도 많았다. 배가 아주 고프지 않을 땐 초코칩 쿠키 하나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사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일을 쉽게 질렀는데, 돈과 먹고 자는 것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상황이 오니 욕구란 욕구는 모두 증발한 것 같았다. 니슈에서 카우치서핑을 이용한 것 역시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카우치서핑 호스트의 이름은 옐레나였다. 옐레나는 그리 작지 않은 집에서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살았다. 그와 그의 가족은 더할나위 없이 친절했고 집은 아늑했다. 옐레나는 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방을 내어주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은 옐레나의 집에서 맞는 셋째 날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깊게 잠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이다가 낮 열시가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 나는 잘 잤느냐고 물어보는 옐레나에게 몸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아, 하고 대답했다.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옐레나가 내 이마에 손등을 얹더니 화들짝 놀라며 나를 거실 소파에 눕혔던 것, 어렴풋하게 열이 40도 가까이 끓는다는 말을 들은 것, 중간중간 나를 깨워 상태를 묻는 옐레나의 가족에게 한국어로 무어라 대답했던 게 흐릿하게 생각난다.


온종일 기절하듯 잠만 잤다. 몸은 고열로 절절 끓었다. 땀이 너무 나서 입고 있던 흰 티셔츠가 걸레처럼 축축해질 정도였다. 아프지 않기 위해 이때껏 수많은 최선을 다한 몸은 쉽게 회복이 어려웠다. 펄펄 끓던 열이 내리고 나서부터는 화장실을 바삐 오갔다. 몸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다 빼내다 못해 아예 내 존재 자체가 사라질 지경이었다. 나는 변기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며칠이 지나도 설사가 멈추지 않아 나는 결국 불가리아로 가는 기차 편을 뒤로 미뤘다. 화장실이 없거나, 있어도 변변찮을 기차 안에서 실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2일 전

“마치 아프러 너네 집에 왔던 것 같네.”

내가 퀭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옐레나는 괜찮다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혹여 호스텔에서 이렇게 아팠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니슈에서 총 6일을 머물렀지만 내가 한 것이라고는 지루한 성벽 하나를 둘러본 것과 옐레나의 친구들과 밤에 맥주를 마신 것이 전부였다. 나는 짐을 택시에 싣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택시 기사가 무어라 말을 걸었지만 대답할 힘이 나지 않았다.


니슈에서 소피아까지는 기차로 5시간이 걸렸다. 나는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을 해둔 호스텔로 향했다. 소피아의 호스텔은 생각보다 훨씬 으리으리했다. 이때까지 수많은 호스텔에 머물렀지만 그토록 세련된 곳은 처음이었다. 리셉션이 있는 1층은 아주 넓었고 노란 불빛으로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행객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거나 책을 읽고, 지도를 살펴보고 있었다.

여행 중 내게 호스텔은 두 가지 종류로 존재했다.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 같은 호스텔과 친구를 사귀지 못할 것 같은 호스텔 중 소피아의 호스텔은 후자에 속했다. 5개월간 인도의 아담한 숙소나 세르비아의 작은 마을에만 있다가 깔끔하고 거대한 호스텔에 오니 주눅이 들었다. 깨끗한 화장실과 정리된 시스템은 분명 편리했지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여행자들은 없었다. 나 역시 누구에게도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다.


내 방은 23인실 혼성 도미토리였다. 그 으리으리한 숙소에서 가장 저렴한 방이었고, 또 가장 시끄러운 방임이 틀림없었다. 건물의 가장 위층 다락방 같은 곳에 스물세 개의 침대가 다닥다닥 놓여있었다. 몇 개의 침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람이 누워있었다. 나지막한 수다 소리와 코 고는 소리가 방 이곳저곳을 맴돌았다.

나는 삼십 분 간격으로 잠에서 깼다. 아침 일곱 시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긴장한 탓이기도 했고 주변의 소음 때문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문을 열고 닫으며 방을 드나들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벽을 울렸다. 새벽 다섯 시에는 프랑스 여자애 둘이 침대에 앉아 제집 안방인 양 떠들어댔다. 시끄러워 눈을 번쩍 떴는데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깔깔거리는 소리가 온 데 방자했다. 예의를 밥 말아 먹었다는 한국식 표현이 그들에게 기막히게 잘 어울렸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방을 빠져나왔다.

호스텔 1층에는 뷔페식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가격을 물어보니 한화로 5천 원이 넘었다. 그 당시 5천원 어치의 식사는(그것도 아침밥이!) 내 예산을 훨씬 초과했다. 나는 아침 식사가 굳이 뷔페일 필요는 없다고 고픈 배를 다독이며 곧장 체크아웃을 했다. 몇 시간 만에 다시 기차역으로 되돌아가는 길목에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는 그 호스텔을 이용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12시간 전

소피아에서 폴스키 트람베쉬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좌석을 찾기 위해 표를 살펴보았지만 번호나 알파벳 같은 건 쓰여 있지 않았다. 나는 이 칸 저 칸을 헤매다 대충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못 다한 잠을 자고 일어나니 창밖으로 해바라기 밭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같은 칸에 앉아있던 승객들은 중간에 내리고 새로 탑승하기를 반복했다. 소피아역에서 아침 일곱 시에 출발한 기차는 오후 두 시가 되어서야 폴스키 트람베쉬 역에 다다랐다. 나는 역 앞 의자에 앉아 댄에게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댄은 나의 첫 워커웨이* 호스트였다. 영국 사람인 댄은 자신이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는 예술가라고 소개했다. 그는 불가리아의 아담한 마을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많은 여행자들이 워커웨이를 통해 그의 집을 거쳐 간 듯 했다. 댄의 집에서 일을 하고 간 여행자들의 후기는 찬사로 가득했다. 강아지들이 사랑스럽다, 댄은 너무 좋은 사람이다, 마을이 평화로워 행복했다, 떠나기 아쉬워 예정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따위의 글이 줄줄이 이어졌다. 내가 할 일은 댄이 영국에 간 사이 남겨진 그의 강아지 세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빈 집을 돌보는 것이었다.

기차 역 뒤편으로 펼쳐진 폴스키 트람베쉬 마을은 아늑해보였다. 고즈넉한 마을에서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싱싱한 채소로 요리를 해먹는 상상이 머리 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불가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살아본다는 건 아주 특별하고 귀한 경험이 될 것 같았다. 남들이 쉽게 겪지 못할 일이라는 생각에 들뜬 마음과 자부심까지 일었다. 상상 속에서 나는 이미 동네 산책을 하며 마을 사람들과 따뜻한 인사를 주고 받고 있었다.


댄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몇분 뒤, 그는 내가 저녁 8시까지 근처 카페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의 집 열쇠를 가지고 있는 불가리아 청년이 당장은 시간이 안 된다는 이유였다. 아뿔싸. 아픈 몸이 아직 완벽히 회복되지 않은데다가 한 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싶었는데.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맥이 탁 풀렸다. 약속 시간까지는 여섯 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나는 댄이 알려준 마을 입구의 카페에서 아이스티 한 잔을 시키고 앉았다. 마을을 조금 돌아볼까 생각을 하다 짐을 맡길 곳이 없어 마음을 접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카페는 와이파이 연결이 가능했다. 나는 여섯 시간 내내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주구장창 보다 지루해지면 노트에 생각나는 것들을 끄적였다. 저녁 여섯 시 쯤에는 토마토 파스타를 하나 시켜 허기를 지웠다. 파스타는 편의점 전자레인지에 돌린 것 같은 맛이 났다.


댄의 집은 폴스키 트람베쉬 마을에서 조금 더 떨어진 카란치 마을이라는 곳에 있었다. 카란치 마을까지는 택시를 타고 더 들어가야 했다. 택시 기사는 영어를 하지 못했다. 우리는 댄이 보내 준 지도 한 장과 손발로 소통을 해야 했다. 설상가상 카란치 마을까지 가는 길은 마치 정글 같았다. 멋대로 자란 풀밭과 숲 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택시에 타고 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카란치 마을에는 집시가 많았다. 유럽의 집시는 과거 전쟁 중에 포로로 끌려온 인도 사람들이라고 했다. 인도인과 똑 닮은 생김새의 사람들을 마주치자 나는 다시 인도 여행의 초반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인도에 있을 때 어딜 가든 따라다니던 불쾌한 시선과 지겹던 성희롱이 떠올랐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건 그닥 도움이 되지 못했다.


툴툴대는 택시 기사와 진흙길을 뒤져 겨우 도착한 집 앞에서 나는 말을 잃었다. 사진 속 깔끔해보이던 외관은 온데 간데 없었다. 닫힌 문 뒤로 집의 2층에 해당하는 부분이 보였는데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아주 오래된 폐가 느낌이 풀풀 났다. 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고 주변은 온통 거침없이 자란 수풀들로 뒤덮여 있었다. 택시 엔진 소리를 빼고는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택시 기사에게 돈을 머뭇머뭇 건네며 이대로 다시 짐을 싣고 기차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빠졌다. 그러나 고민할 새도 없이 기사는 돈을 낚아채고 나를 무심히 버려두고 떠났다. 골목은 아주 무거운 고요에 휩싸였다. 가끔 들려오는 새소리가 섬뜻했다. 나는 정체 모를 사람들이 사는 깊고 깊은 숲속 마을에, 오롯이 나와 내 배낭 홀로, 무너져 가는 집 앞에 덩그러니 놓여졌다. 보통 외진 곳에서 여성에게 벌어지는 다양한 종류의 사건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못 산다는 말이 입 밖으로 투둑 튀어나왔다. 얼굴이 삽시간에 울그락 불그락 달아올랐고, 나는 그대로 흙바닥에 주저 앉아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 나는 골목 이리저리를 방방 뛰며 10분 여간 눈물을 휘날리다가, 열쇠를 가져다 줄 불가리아 청년이 곧 올 것 같다는 생각에 울음을 그쳤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질질 짜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아냈다. 때마침 옆 골목에서 불가리아 청년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멀리서도 내가 울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했다. 청년은 내 앞에서 어색하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나는 조금 창피해졌다. 아무 일 없었던 척 방긋 웃어보았지만 땡땡 부은 눈두덩이 살이 구겨지는 게 느껴졌다. 아마 그에겐 내 모습이 제법 기괴해 보였으리라. 청년은 내 눈을 피하며 멋쩍은 웃음을 띄고 열쇠를 꽂았다. 초록색 철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에 마음이 살짝 놓인 나는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지만, 청년은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으로 이 마을에 장 볼 마트 하나 없다는 것을 알려준 후엔 내내 머쓱한 미소만 띄웠다. 그리고 문을 열어준 지 10분도 되지 않아 마당에 댄의 강아지 세 마리와 나를 남겨두고 떠났다. 나는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되었다.

불가리아 청년이 넘겨준 열쇠 꾸러미 중 하나를 2층 문 걸쇠에 꽂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 후 문을 열었다.


나무문이 끄드득거리며 곧 부서질 듯한 신음을 냈다. 집은 구석구석 빠짐없이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바닥에는 버석거리는 나뭇잎이 굴러다녔다. 방의 침대와 소파 위에도 나뭇잎이 쌓여있었다. 최소한 이 집에서 잠이라는 걸 잘 수는 있는지 알기 위해 옷장 문을 열자 뒤엉킨 이불과 베개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원래 천이 회빛을 띄었는지, 아니면 때가 탄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3일 전까지 다른 여행자가 집을 돌보았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 여행자는 어디서 잠을 잤던 걸까. 집은 몇 년 동안 사람 발길이 끊긴 곳 같았다. 페인트는 벗겨져 바닥에 조각조각 떨어지고 있었고 벽은 부서져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걸음을 옮겨 방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낙엽, 먼지, 곤충 시체가 인테리어 소품마냥 모든 방에 널려 있었다. 마침내 화장실에 도달했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다시 주륵주륵 눈물을 뿜어냈다. 화장실에는 변기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변기 커버만 있었다. 좁은 화장실 한쪽 벽면에 나무 판자가 앉을 수 있게 박혀있었고 판자엔 동그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 위에는 변기 커버가, 그리고 그 밑엔….

그때부터 나는 내가 진짜로 불가리아에 있는 건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더러운 세면대와 타일 바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변기 커버가 놓인 판자 구멍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라도 놓여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파여 있기라도 해야 할 곳인데도 말이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잘 곳도 없는데 이젠 똥 쌀 곳도 없구나. 돈 몇 푼 아끼자고 똥도 못 싸는 곳에 왔구나. 헛헛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변기 없는 변기 앞에 서서 다시 눈물과 콧물을 질질 흘렸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루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지금 이 순간 한국어로 대화를 나눌 누군가가 절실했다. 모든 게 무너져가는 집에서 와이파이만 빵빵하게 잘도 터졌다. 서로 연락을 하지 않은지 꽤 되었던 터라 루는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웃으면서 울기 시작했다. 루의 당황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고, 나는 집을 걸어다니며 무너지는 벽과 변기 없는 화장실을 보여주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그의 웃음소리가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징징 울렸다. 루는 그새 머리가 밤송이처럼 자라있었다. 그러나 내겐 그의 머리 길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정신 따윈 없었다. 대신 루의 얼굴 뒤쪽으로 희고 깔끔한 가구와 벽지가 보였다. 유럽 특유의 노란 조명도 그녀의 등 뒤로 반짝거렸다. 루가 머무르고 있는 아늑한 집을 보자 서러움은 더 극대화되었다. 나는 내가 앉아있는 방의 옥빛 페인트 벽을 쳐다보았다. 페인트가 쩌저적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루를 쳐다보며 다시 울었다. 루 역시 나를 쳐다보며 다시 웃었다.

전화기를 가운데 두고 한참을 울고 웃다, 루가 웃음을 뚝 거두었다. 루 특유의 야무진 표정이 화면을 꽉 채우고 그가 입을 열었다.

“유랑아, 당장 거기서 도망 쳐.”

下편에서 계속

©성지윤

*카우치서핑Couchsurfing : 현지인은 무료로 잠자리를 내어주고 여행자는 현지인과 문화를 교류한다. 운이 좋으면 따뜻하고 친절한 호스트를 만날 수 있으나, 간혹 스스로를 '누디스트Nudist'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사람들도 있으니 주의할 것.

*워커웨이Workaway : 국제 알바몬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행자는 노동을 제공하고 호스트는 숙식을 제공한다. 경우에 따라 소정의 급여를 주는 곳도 있으나 흔치는 않다. 장기 여행자에게는 돈을 아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나 이것도 경우에 따라….

글 옥의진(유랑), 사진 성지윤(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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