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PD로 전직했다. 글 쓰는 것보다 영상을 만드는 걸 더 좋아해서. 영상이 왜 좋냐고 물어본다면... 일단은 종합 예술이라는 점에서 더 재밌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전략적으로 사용해서 사람들을 조종(?)하는 게 재밌다. 평소엔 남의 영상을 보고 '난 무엇에 조종 당하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만 했는데, '난 이 영상으로 사람을 어떻게 조종하려 했는가'에 대해서도 정리를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과거에 만들었던 영상의 기획 아이디어를 글로 정리해둔다.
PD로 전직한 뒤 제작한 첫 시리즈물 : 과학 기자들의 티타임
(초반 기획)
영상은 매체이기 때문에 반드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무엇을 전달하는가?'에 따라 영상의 성격이 결정된다. 즐거움, 지식 전달, 소통, 주장, 비판, 비난 등... 다양한 것을 전달할 수 있는데, 일단 내가 회사에서 만들어야 하는 건 '과학 전달'이 첫 번째였다.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회사니까. 그래서 내가 만들어야 하는 영상은 '지식 전달'이 가장 큰 목적이 된다.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은 '지식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이다. 가장 대표적인 건 '강연'의 형태다. 여기서 말하는 강연은 조금 넓은 범주의 강연이다. 화자가 청자에게 '자, 지금부터 내가 이걸 알려줄게'라는 화법을 지니고 있으면 모두 강연이다.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강연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뭘 가르쳐주려고 하면 이상하게 졸리거나 딴 짓이 하고 싶어지더라고...
지식을 우회해서 전달하는 방법이 있다. '토크쇼'다. 토크쇼는 화자와 청자가 모두 화면 안에 갇혀 있다. 시청자는 이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시청자는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부담이 덜하다. 그래서 난 토크쇼 보는 걸 좋아한다. 출연자의 부담도 덜하다. 강연에서의 말 실수는 '에러'지만, 토크쇼에서의 말 실수는 '이벤트'에 가까우니까.
그렇다고 뜬금없이 시청자들에게 '자, 이제부터 저희가 토크쇼를 해보겠습니다!'라고 하긴 싫었다. 대화를 엿듣는 게 토크쇼의 재미인데, 갑자기 눈 앞에서 토크쇼를 해버리면 이건 사실상 강연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물론, 토크쇼가 압도적으로 재미있거나 유명한 사람이 등장한다면 갑자기 토크쇼를 시작해도 되지만... 나에겐 그 정도의 능력도, 인맥도 없다. 그래서 뭔가가 필요했다.
'놀면 뭐하니'에서 힌트를 얻었다. 집요하리만큼 '먹는 장면'을 반드시 넣더라고. 화면 속 사람들이 먹으면서 대화를 하니까 확실히 대화를 엿듣는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아마도 행위의 중심이 '대화'에서 '먹는 것'으로 옮겨갔기 때문이 아닐가 싶다. 무언가를 먹으면서 나누는 이야기는 분명 '일상 대화'일 확률이 높으니까, 엿듣기에도 더 편하겠지.
아하! 그러면 우리도 뭔가를 먹어야겠다. 밥을 먹긴 좀 빡세니까 차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과학 기자들이 차를 마시면서 나누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이라는 컨셉이 잡혔다.
(세부 기획 : 무슨 얘기를 하지? 어떻게 얘기하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하다 보면 원고 분량 문제로 빠져야 하는 내용들이 꽤 많다. 사실 진짜 재밌는 내용은 빠진 부분 안에 들어있는 경우도 많다. 개인적으로 기자로 일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기사에선 기자의 주관 혹은 감정이 되도록이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기사는 에세이가 아니니까. 기사의 목적은 정보 전달에 있으니까 기자의 목소리는 빠져야 하는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꼈던 이 아쉬움을 동료 기자들도 공감한다면, 기자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줬을 때 기자들도 내심 반가워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방송을 만든다면 동료 기자들에게 부담을 덜 안겨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촬영을 위해 동료들이 추가적으로 취재를 진행해야 하거나, 대본을 외우거나, NG를 걱정하며 전전긍긍하지 않길 바랐다. 진짜 티타임을 가지듯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길 바랐다. 평소에 친했던 동료 기자들에게 조심스럽게 프로그램의 취지와 함께 섭외 요청을 던져 보았다. 다행히 기자들도 '재밌겠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기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컨텐츠의 중심 주제는 '기자가 취재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로 정해졌다. 이렇게 기획을 하면 과학을 이야기하면서도 강연을 피해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A에 대해 취재를 하다가 B 사건을 겪으면서 C라는 감정을 느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시청자들은 B와 C에 주목할 거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가지니까. 그런데 얼떨결에 A라는 과학적 정보도 습득한다. 괜찮은 전략인 것 같았다.
'과학'보다는 '이야기'에 더 집중된 기획이기에, 시청자들에게 '이야기'를 더 확실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방송 말미에 '흩어졌던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넣고 싶었다. 그래야 시청자들도 뭔가 하나는 얻어간다고 느낄 테니까.
(제작, 그 후)
조회수는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작 과정과 결과물은 마음에 들었다. 아쉽게도 기자들과 내가 모두 다른 업무들로 일이 많아지면서, 그리고 주축 멤버였던 기자 한 명이 퇴사를 하면서 티타임 시리즈는 현재 제작을 멈췄다. 그래도 이 시리즈를 만들면서 가져갔던 고민과 컨텐츠 제작 노하우는 지금도 유용하게 잘 써먹고 있으니까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