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자유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내 바로 앞을 달리는 자동차 번호판이 1111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잠시 후 나를 추월하는 또 다른 차 번호는 8888번이었다. 네 자리 수가 같은 번호판을 보기도 쉽지 않은데 두 대가 동시에 내 눈앞에서 주행하고 있다니!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당시 내 차 번호가 7777번이었던 것이다.
아래층에 오래 살던 사람이 이사를 가고 다른 사람이 입주했다. 이전 집주인은 영어 학원 강사였다. 한 번은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그와 남녀 친구 일행이 탔다. 여자가 자신이 산 바지를 가리키며 뭔가 설명을 하길래 나도 무심코 그녀의 바지를 보았다. 그랬더니 그녀의 표정이 약간 변하며 일행에게 영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머쓱해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1층까지 몇 층 안 되는 구간이지만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층이 바뀌는 불빛만 바라보며 그냥 내 머리만 살짝 긁적였다.
나는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한국 사람 평균 이상은 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전체적으로는 공부를 못하는 편이었지만, 영어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학년 전체에서 1등 한 적이 있고(당시 한 학년은 약 500명), 3학년때는 전국에서 100위권에 들기도 했으며, 미 8군에서 군 생활도 했다. 복학해서는 원어민 교수들에게 지도를 받았고 회사에서는 퇴직할 때까지 한 번도 해외 고객들과 하는 업무를 벗어나지 않았다. 토익 듣기에서 만점을 받기도 했다.
아래층에 새로 입주한 이웃과 인사만 나누다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나처럼 주로 집에만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작가라고 하며 인터넷 검색해 보면 작품과 자신에 대한 정보가 나온다고 친절히 알려주며 급히 가던 길을 계속했다. 찾아보니 추리소설 작가로 그 세계에선 나름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저도 단역이긴 하지만 <작가>입니다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못하고 입가에 맴돌다 사라졌다. 예전 송추에 직원들과 놀러 갔을 때 후배 부장이 펜션 주인인 아주머니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작가>라고 하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유명 작가가 아니면 평범한 작가의 사회, 경제적 위치란 그저 그런 위치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