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살면서 지출하는 정서적 비용
해외에 산다는 건
가족,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산다는 건
분명 이득도 있지만 비용도 존재한다.
명확한 비용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과 시차가 생긴다는 것.
오늘은 그걸 가슴 깊이 느끼고 있다.
현지 시간 어제저녁 9시쯤 어머니의 어머니인 나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오늘 오후 4시 30분쯤 동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아 그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고 싶었지만 한국은 새벽이어서 한국 시간 오전이 될 때까지 몇 시간에서 반나절을 기다려야 한다....
동생과 전화를 하는 순간부터 별별 생각이 오가더라.
몇 년 전 영국에 살고 있을 때 수 십 통의 이력서 끝에 면접을 본 기념으로 수고한 나에게 주는 선물로 네덜란드에 놀러 갔다. 공항에서 내려 좋아하던 음식점에 들어가자마자 면접을 봤던 곳에서 합격했다는 전화가 왔다. 자랑을 할 겸 할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는데 서울의 한 병원이시란다. 그러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난 네덜란드에서 핀란드, 핀란드에서 한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고 인천공항에 도착한 즉시 서울의 한 병원으로 갔다. 집에도 안 가고 배낭을 메고 추레한 행색으로 병실에 있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든든해하면서도 동시에 미안해하시더라. 주말 동안만 놀다 들어가려고 네덜란드에 갔다가 한국까지 가서 할아버지께서 떠나고 나서야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때 내가 할아버지께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아무도 할아버지의 상태를 알려주지 않았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쩌면 그리고 며칠, 몇 주가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을 수 있었다.
그때 겪었던 가족 간의 '시차'는 한동안 가족에 대한 서운함과 또 비슷한 일을 겪을지 모른다는 일종의 불안으로 남았다. 분명 부모님도 경황이 없으셨을 테고 멀리 나가 있는 나에게 알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 알리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왜 그리 서운했는지. 팬더믹이 터지고 국경이 한 두 군데씩 닫자, 가장 먼저 그때의 불안이 생각났다. 내가 아프거나 만약 가족이 아팠을 때 멀리 떨어진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정을 하고 12시간 내에 멕시코 와하카주의 시골 동네에서 3번 경유 & 총 48시간 여행을 하는 한국행에 몸을 실었다.
다행히 지금은 서운한 것도 불안한 것도 전혀 없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고 있을 상실과 슬픔을 옆에서 같이 공유할 수 없다는 것과 모든 행동에는 '시차'가 생긴다는 것이 안타깝다.
아직은 할머니께서 떠나셨다는 게 전혀 와닿지가 않는다.
동생과 전화를 끊고 수많은 엑셀과 코딩이 켜져 있는 모니터를 보며,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이런저런 상실을 겪고 경험을 하면서 무엇이 내 삶에 중요한지는 분명해졌다. 그래서 지금에 깨어서 더 느긋해지려고 하고 즐기려고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보냈을지 모를 의미 없는 바쁨과 중요하지 않은 스트레스들이 있지는 않았나, 하는 반성의 순간을 보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상사에게 사내망으로 전화가 왔다. 한 번도 정해진 회의 시간 아니면 전화하지 않던 분이라 놀라기도 하고 새삼 반갑기도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할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개인사를 잘 공유하지 않던 터라 말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얘기했다.
상사도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왔기에 '시차'로 오는 무력감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할머니의 연세와 건강 상태를 물어봤다. 할머니에 관해 물어보는 말들이 이곳에서 누군가와 할머니를 기억하는 행위로 느껴져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상사에게 곧 나올 책에 대해 말했다. 면접을 제외하고 한 번도 상사에게 일 외적인 것에는 말한 적이 없었던 터라 책에 대해 말하면서 나 자신에게 다시 한번 놀랐다. 오늘 새벽, 한국의 출판사로부터 다음 주 월요일에 책 인쇄가 들어간다는 말과 함께 8월 초에는 전국의 서점에 책이 나올 거라면서 그 책의 첫 장에 할머니에 대한 헌사가 담겨있고 마지막 장에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들어간다고, 할머니에게 보여드리지 못해 좀 아쉽다는 말을 했다.
꾹꾹 누르고 정제하고 있던 감정이 그때 수면 위로 올라왔던 것 같다. '좀 아쉽다'라고 표현하면서 속으로는 엉엉 울고 싶었지만 정제된 프로페셔널한 어른의 가면을 유지했다.
할머니가 책에 대해 아시냐고 물었을 때, 모르실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직전 할머니는 응급실을 통해 병원으로 가셨고 중환자실과 일반 병동을 여러 번 이동했다. 하루에 정해진 30분 동안 한 명만 면회가 가능하다는 병원 정책으로 병원에 들어가신 뒤에는 뵙지 못했다. 책과 헌사에 대해서는 부모님께 공유하기는 했지만 할머니의 그간 건강 상태로 봤을 때 전해지진 않았을 것 같다. 그나마 지난 주말 아버지의 어머니인 할머니와 전화를 하며 책에 대해 말씀드린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는 그에게 그 말 자체로 큰 힘이 된다는 프로페셔널한 어른의 대답을 하고 화상 회의를 끝냈다. 그러고 나니 단 이틀 전, 한 동료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르더라. 동료는 이번 주말, 인도 고향으로 간다는 말을 꺼냈다. 여름휴가를 가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 같았던 삼촌이 돌아가셨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고 그때 병원에 계신 할머니가 생각나면서 우린 멀리 떨어진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의 상실에 대해 위로하면서 그녀의 삼촌의 삶을 인정해 주던 대화가 생각나면서, 오늘 저녁은 세상을 떠났지만 멋짐을 남기고 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보낼 생각이다. 곧 한국 아침에 맞춰 가족들과 전화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에 현재형일 수 없다는 점.
나의 삶에도 그들의 삶에도 '시차'와 '이해 차이'가 생긴다는 게
해외살이의 가장 큰 비용이 아닐까 싶다.
더 사랑하고 표현하며 살아야겠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