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인 나에게 부모님이 허락해주셨던 여행지 두 곳 있었다. 큰 집이 있는 경기도 용인과 외갓집이 있는 경기도 안성이다. 방학이 되면 용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언니와 함께 떠나는 여행길은 설레고 즐거웠다. 가끔 차멀미도 했다. 어린 시절 오랜만에 타는 버스 여행이 버거워도 힘든 척을 하지 않았다. 언니를 힘들게 하면 데리고 다니지 않을 수 있으니, 눈치껏 기분을 잘 맞춰야만 했다. 아버지의 고향인 용인 큰댁에 가면 흩어져 지내던 사촌들, 조카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었다.
아버지는 여섯 형제 중 막내다. 큰아버지의 아들 중에는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촌오빠들이 있다. 그 오빠들의 자녀들 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조카들이 있다. 이 조카들은 어린 당고모인 나에게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아줌마라고 불렀다. 신나게 놀다가 의견 충돌이 생길 때, 항상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치트키가 있었다. “아줌마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어린 당고모의 당찬 호통에, “아, 예 아줌마.” 기다렸던 대답이 나오면, 이 상황은 무조건 나의 승리로 마무리가 된다. 내가 조카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큰집 안방에는 여러 가지 냄새가 있었다. 화로 속 회색 재에서 나는 매캐한 냄새, 달콤한 군고구마 냄새, 두부가 많이 들어간 쿰쿰한 청국장찌개 냄새, 굳어버린 인절미를 구울 때 나는 고소한 냄새, 모두 후각에 기억되어 있는 추억들이다. 그곳엔 미각으로 기억되는 것도 있다. 겨울철 윗방에 있던 고구마 자루에서 꺼낸 생고구마의 고소한 달콤함, 작은 고구마를 따로 모아 쪄서 말린 말랭이 고구마의 쫄깃하고 진한 달콤함, 무 구덩이에서 꺼낸 겨울무의 시원 달콤한 맛......
우리가 주로 머무는 곳은 둘째 큰아버지 댁이었다. 목재 사업을 하셨던 제일 큰아버지는 오래전부터 경기도 수원에 사셨고, 아버지 고향엔 둘째, 셋째, 넷째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살고 계셨다. 둘째 큰아버지는 한국전쟁 통에 아들딸을 모두 잃으셨고 넓은 집에 두 내외분만 계셨다. 고요하던 집이 방학만 되면 북적였다. 우리를 위해 심성 착한 큰아버지와 부지런한 큰어머니는 많은 음식을 준비하셨다. 인절미를 만드시려고 나무절구 앞에 마주 서서 찹쌀밥을 찧던 두 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수원 큰아버지는 국가유공자다. 기억 속의 큰아버지는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던 근엄한 할아버지였다. 용인 3.1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옥고를 치르시다 생긴 장애라고 했다. 아버지 고향 동네 길 건너편에 3.1 만세운동 기념탑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기념탑에는 돌아가신 큰아버지 성함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왠지 숙연해지면서 으쓱해지는 느낌이다.
어릴 적 둘째 큰아버지, 큰어머니는 모습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분명 할아버지, 할머니셨다. 무언가 얘기하면 인자한 얼굴로 그냥 잘 들어주셨다. 얼굴을 뵌 적이 없던 조부모님을 대신해서 푸근한 할머니 할아버지 역할을 하셨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갈 때 인사를 드리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등이 굽은 큰아버지가 안쓰러웠고, 큰어머니의 선한 눈이 슬퍼 보여서 그랬나 보다. 서울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고 창 밖에 계신 큰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다시 코끝이 찡해졌었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동네 건너편 산을 보며 부탁을 했었다. 날 대신해 두 분을 잘 지켜달라고. 둘째 큰어머니가 ‘독조봉’이라고 알려주신 그 산봉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그곳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가끔 용인에 가면 부모님 산소 옆에 있는 둘째 큰어머니 큰아버지 산소를 찾는다. “저 왔어요.” 인사를 하면, 환갑이 훌쩍 넘은 나를 두 분은 여전히 다정하고 따뜻하게 맞아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