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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냉이 Oct 16. 2020

짧지만 무거운 책, <눈먼자들의 국가>

눈먼자가 되지 않기 위한 외침

2014년 4월 16일. 난 아직도 평범할 줄만 알았던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교칙에 따라 일과 중 휴대폰을 제출할 수밖에 없었고, 세월호의 침몰 소식과 전원 구조 소식을 당시 수업을 들어오셨던 과학 선생님을 통해서 들었다. 전원 구조라는 속보에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사실조차 잊혀졌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가 계속되었다. 여느 때처럼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급식실로 달려가고, 점심을 먹고 나선 친구들과 운동장 산책을 하며 놀다가 오후 수업을 졸면서 듣고 하굣길엔 편의점에 들러 간식을 사 먹었다. 집에 와선 잠시 낮잠을 자고 저녁을 먹고 학원에 갔다. 그날이 평범하지 않은 수요일이란 사실을 그때부터 깨닫기 시작했다. 전원 구조가 아니고 아침에 침몰한 배에 아직도 사람들이 남아있다고 학원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다. 순간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그날 학원에선 수업보단 다 같이 휴대폰으로 뉴스를 실시간으로 확인했었다. 타이타닉과 같은 영화 속에서만 보던 장면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성당을 다니지만, 그날만큼은 간절하게 신을 찾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누군가에겐 소중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간절하게 저들이 안전하게 살아 돌아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시간 이후로 더 이상의 생존자가 나오지 않을 거란 사실은 상상조차 못했다. 사람들은 에어포켓과 골든 타임에 희망을 걸었다. 에어포켓이 제 기능을 해준다면 하루 정도는 배 안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실시간 검색어에 세월호 관련 내용이 장악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이 진도 팽목항을 방문했고 언론은 앞다투어 이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당시 체육관에서 자식의 이름을 외치며 울고 있는 부모들의 눈물이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못하리라 예측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뉴스 오른쪽 상단에 

실종자 수는 줄고 사망자 수는 늘어났다. 


실종자의 가족들은 하나 둘씩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시신과 함께 유가족이 되어 체육관을 벗어났다. 그렇게 2014년 4월 16일은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평생 빼어내지 못할 못이 되어 박혀버렸다.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들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책에선 이 사건을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라고 정의한다. 사고와 사건을 엄격하게 구분한 것이다. 사고란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이지만, 사건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받을 만한 뜻밖의 일이다. 비슷한 듯해 보여도 자세히 생각해보면 확연한 차이이다. 


<눈먼 자들의 국가>라는 책을 읽기 전까지 세월호 침몰을 감성적으로 접근했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아픔에 공감하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제는 이성적으로 봐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함께 공감하고 슬퍼하되 안대를 쓴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조금은 힘들지라도, 함께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에,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애초에 타면 안 되는 배였다고 한다. 일본에서 18년이나 운항한 수입된 낡은 배였다. 더 많은 화물을 실으려고 무리하게 개조된 배였다. 그뿐만 아니라 배를 운항해서는 안 되는 날씨였기도 하다. 그날 밤 인천항에서 출발한 배는 세월호가 유일하다. 그렇게 그 배는 침몰하고 말았고,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방송을 하고 자신들만 서둘러 탈출하였다. 침몰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해경 123정도 가라앉고 있는 배 근처를 돌며 선내에는 진입하지 않고, 스스로 힘으로 탈출한 승객들만 실어 왔다. 일분일초가 소중한 상황에서 부모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해경은 구조하는 척에 가까운 행위만 취했다. 


당시에 봤던 한 뉴스 장면이 6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실종자 부모가 오열하면서 내가 저 바닷물을 다 마셔서 죽는 한이 있어서도 우리 애들 데리고 나오고 싶다고,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게 내 새끼 구해달라고 높은 사람들 바짓가랑이 잡는 것밖엔 없다고. 자식이 바다에 잠겨있는데 생사도 모르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청와대는 뉴스를 보고 사고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일반 시민과 마찬가지로 뉴스로 소식을 접하는 사람들이 과연 컨트롤타워라고 할 수 있을까? 심지어 4월 16일은 언론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실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탑승객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내었고, 언론사들은 속보 경쟁에 뒤지지 않기 위해, 조회 수를 많이 받아 메인 기사로 등록되기 위해, 그저 받아쓰기식 보도를 하였다. 전원 구조라는 속보를 보고 진도로 향하던 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두 번이나 박은 것이다. 


이날의 사고는 점점 정치적인 사건으로 커져 나갔다. 


배가 침몰한 당일 정부에선 아무런 대책 회의가 없었다. 비서실장도 대통령의 7시간 동안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세월호 사고의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주장하던 정부가 꼬리를 밟힐 것 같자 숨어버렸고 국민의 관심을 유병언 일가에 돌렸다. 그들을 찾으면 마치 바다에서 싸늘하게 주검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처럼 말이다. 한동안 온 국민의 관심은 ‘유병언이 어디에 숨어있나’였다. 유병언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사람들의 유벙언 일가에 대한 관심은 일축되었다. 국가의 무능력함을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긴박한 재난의 상황에서 국가는 공백 상태였으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앞장서서 국민을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사라졌다. 국가 재난대응체계의 공백 및 무능력과 더불어 해운산업과 감독 당국의 유착 관계의 문제와 선박 자체의 기술적인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의 결과이다.


지나간 과거에 만약이란 없다. 

그러나 이 사건만큼은 ‘만약’이 절실하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같은 생각일 것이다. 만약 세월호가 사고 하루 전날 자욱한 안개를 이유로 모든 배의 출항을 금지했었더라면, 만약 선실에서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이 아니라 밖으로 나오라는 안내방송을 한 번만이라도 해줬더라면, 만약 팬티차림으로 혼자 도망쳐 신문 1면에 실린 선장이 아니라 승객을 모두 대피시킨 후에 나온 선장이었다면, 만약 침몰 직후 해경들이 근처를 맴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배가 조금이라도 덜 가라앉았을 때 선내로 진입해보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고 당시 2014년엔 중학생이라 잘 몰랐다. 그저 사람이 많이 죽어서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21살 성인이 되어보니까, 18살, 꽃다운 나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는 일인지 알게 되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지난 세월 공부만 하며 고생하던 것에서 벗어나 꿈을 향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가질 수 있는 나이인데, 그렇게 가버린 것이다. 


중3 때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왔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체코로 이동하는 기차를 탔을 때, 독일인 교사 2분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대한민국에서 왔다고 소개하자 바로 세월호 사고를 이야기하셨다. 신문에서 한국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고, 당시 해외에서 배가 침몰한 사고를 함께 말씀하시면서 안타까워하셨다. 외국인을 만나서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했을 때 제일 먼저 한국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가 세월호 사고였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흔히 외국인들이 한국 하면 떠올리는 김치, 불고기, 강남 스타일, 방탄소년단이 아니라는 점이 말이다. 300여 명이 넘는 사망자 수가 나올 때까지 정부는 무엇을 하였나. 순간 너무 창피해졌다. 한국인이 보기에도 정부의 무능력으로 인해 참사로 커진 사고인데, 외국인이 보기엔 어땠을까. 


나는 그날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자랑스럽지 못했다. 


기울어진 배를 보고 바로 구조작업을 시작했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차가운 물 속에서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독일인 교사의 말에 나는 그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 사고 이후 희생자분들의 이야기가 많이 방송되었다.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주고 친구를 구한 후 사망한 아들, 배 끝자락을 잡고 버텨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손톱이 다 없어진 사람, 선장과 함께 빠져나간 선원들과는 다르게 마지막까지 승객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승무원, 수학여행 가는 게 부모님께 금전적인 부담이 될까 봐 아빠가 주신 마지막 용돈까지 쓰지 않고 아끼던 딸, 오빠가 벗어준 구명조끼를 입고 가족 중 혼자 살아남은 소녀.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들이다.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떠오른 사람이 있다. 바로 세월호 사고의 희생자 단원고 2학년 3반 김시연 언니이다. 당시 나는 유튜브에서 시연 언니를 추모한 영상을 보고 언니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언니 어머니의 페이스북 계정을 팔로우하게 되어 가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언니는 동생에게 의젓한 언니, 부모님에게는 살가운 장녀였다. 덩치는 작고 가녀리지만, 열정이 가득하고 의리가 있는 언니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언니는 가수가 꿈이었다. 평소에 노래하는 영상을 많이 찍어 놓기도 했다. 언니가 하늘의 별이 된 후, 작곡가 윤일상씨의 도움으로 언니의 목소리가 담긴 <야! 이 돼지야>라는 음원이 발매되기도 하였다. 수많은 세월호 희생자 중에 왜 유독 시연 언니에게 눈길이 갔는지는 모르겠다. 언니의 밝고 긍정적이었던 모습이 아마 나의 학창 시절과 비슷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언니가 살아있으면 지금쯤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었을까. 세상에 재밌고 행복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왜 다 누리지 못하고 먼저 가버린 걸까. 언니는 나의 존재를 모르겠지만, 귤을 사랑하는 깨박이 언니가 하늘에선 못다 이룬 가수의 꿈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언니가 떠오를 때마다 기도한다. 먼 훗날 하늘나라에서 시연 언니를 만나게 된다면, 그 곳에서 가수가 된 언니의 팬으로 마주하고 싶다.


언니가 떠난 후에 언니 어머니의 페이스북을 통해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소식을 종종 접할 수 있었다. 삭발식을 거행하고 광화문 광장까지 행진을 하고, 차디찬 바닷속에 외롭게 죽어갔을 가족들을 생각하며 아직도 시위를 하고 있는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나도 그 글을 보고 광화문 광장의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다. 가끔 비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언니를 그리워하는 글을 올리신다. 제발 엄마 꿈에 한 번만 나와달라고, 힘없는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런 글을 볼 때면 가슴이 미어진다. 광화문 광장에서 서명운동을 받으실 때 ‘왜 저렇게까지 하냐, 지긋지긋하다’고 하면서 서명운동을 거절하신 분들이 계신다는 글도 보았다. 정녕 그들은 304명의 희생자 중에 자신의 가족이 있어도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우리 누구나 세월호 희생자가 될 수 있었고, 유가족이 될 수 있었다. 사람 일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열 달을 뱃속에서 품고 18년을 키웠는데 

하루아침에 잊으라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정치적 색깔, 이해관계, 이런 거 모두를 떠나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함께 공감해줄 수 있는 것이, 그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안 되겠지만 힘내시라는 말 한마디 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잘 모르겠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 그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헤아릴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유가족들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함께 모여 소리 내어 외치고 있다. 내 자식 살려내라는 것이 아닌, 똑같은 미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이 책의 제목처럼 눈먼자들의 국가에 살고 있는 눈먼자들이었다. 


눈 앞에 사실은 차고 넘쳤지만, 진실은 찾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하나 둘씩 그 사실을 깨달았으며, 눈을 뜨려고 노력하고 있다.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스스로 나아진 인간들의 슬기와 용기에 의해서만 진보한다고 한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지혜로워 지는게 아닌 것처럼, 가만히 놔두면 인간은 나빠지며,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하게 된다. 또 한 번의 비극을 막으려면 우리는 조금은 슬프고 아프지만, 과거를 되돌아보며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해마다 4월 16일이 되면 학교에서, 단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한다. 노란 리본을 달고 추모 영상을 보고 편지를 적으며 안타까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영혼을 기억한다. 천 개의 바람이 된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그래서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각자의 삶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것이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길이며 동시에 묻혀질 위기에 처한 진실을 밝히려는 남은 가족들을 위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눈먼자들의 국가>라는 책을 통해 얻은 내용이다. 책은 얇지만 그 내용은 무겁다. 바로 이게 남겨진 자들이 알아야 하는 진실이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작가 12명이 모여 만든 이 책이 세상으로 나아가서 보다 더 많은 이들이 무거운 진실을 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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