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사르 Oct 17. 2023

신입사원, 말레이시아로 도피하다 - 上

다시 말레이시아

11시였다. 아빠 차를 타는 건 오랜만이었다. 낡은 포터 트럭은 기어를 바꿀 때마다 성을 내는 소리가 났다. 한겨울이었으나 별로 춥지 않았다. 기분탓인 것 같기도 했다. 늦은 시간 버스터미널로 향하는 배속은 잠잠했다가, 설사를 내보낼 듯이 예민하게 굴었다. 며칠 전, 아빠가 사 온 굴을 두어개 집어 먹은 후부터였다. 약을 타먹고, 링거를 맞았지만,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병원에선 따로 검사하지 않았지만, 처음 겪는 극심한 고통이 말해주었다. 


‘너, 노로바이러스 걸렸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행 비행기는 아침 7시에 출발 예정이었다. 취업 후 첫 해외여행이었다. 그동안 가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가장 먼저 가야할 곳은 정해져있었다. 말레이시아였다. 동료들에게 말레이시아를 간다고 할 때,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신기하다, 이색적이다, 말레이시아 가는 사람은 처음 본다’ 등등.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레이시아는 누구나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말레이시아 바다는 서해바다만큼 탁하고, 연중 스콜이 함께 해 늘 우산을 들고 다녀야만 하는, 수도는 화려한 도시라기엔 부족한, 여행지로서는 특별한 매력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게 말레이시아는 여행지 그 이상이었다.


정확하게는 9년 전 늦은 밤, 기숙사 관리자를 깨워 새파란 이불과 배개가 놓은 방을 배정받은 날부터였나, 그 후로 9년간 말레이시아를 목놓아 부르게 된 게. 


지금 봐도 형편없는 영어면접을 치르고 3순위로 지망했던 말레이시아 어느 대학교의 교환학생이 됐었다. 대학본부의 국제협력부장이 미국 가서 영어 못하면 위축되지만, 말레이시아는 그럴 일 없다고 해서 보험처럼 껴넣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막상 말레이시아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자 많이 아쉬워했다. (1순위는 미국, 2순위는 대만이었다.) 개발도상국가인 말레이시아를 굳이 가야하나 싶었다. 그리고 나의 능력이 겨우 그 뿐인 것에 되게 통감했었다. 하지만 당시 학부 3학년 1학기에 재학중이었기에, 다시 교환학생을 준비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단념과 수용이 빨랐던 22살의 나는 말레이시아에 가기로 결심하고서는 학교 안에 있는 서점에서 '말레이시아 100배 즐기기' 책 한권을 사서 읽었다. 그저 영어 실력을 멋지게 늘려오겠다는 포부를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결국 말레이시아를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좋아했다'라는 표현으로 충분할까. 

'사랑했다', 라고 느꼈다고 말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감해줄까. 

친구도 가족도 없는 그곳을 어떻게 그리 사랑했냐고, 그곳이 그저 낯선 이국의 땅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냐고 묻지는 않을까. 내가 그곳이 좋았다고 말해도, 그 감정을 공감해줄 사람은 없었다. 나와 같이 그곳에서 생활했던 대학 친구들 역시 나만큼 그곳을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같은 방을 쓰던 친구는, "네가 현지인들이랑 거의 매일 놀긴 했어." 라고 말하는 정도. 


그래서 시간이 흘러 나는 내가 환상을 본 게 아닐까, 내가 그 당시의 생활들을 꾸며내고 덧붙여 미화한 것은 아닐까. 두고 두고 궁금해했다. 그래서 취업을 하고 퇴사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해져 이민에 관한 유튜브나 블로그, 카페를 찾아보고는 했는데 나와 비슷한 이유로 말레이시아 이민을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동남아시아 여러나라를 다니며 살아봤지만, 사람들이 따뜻한 곳은 말레이시아였다.'라는 사람. 

'물가와 생활수준이 가장 적당한 곳'이라는 사람.


저마다 말레이시아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다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이 친절하고, 영어권 국가라는 것이 가장 큰 이점으로 작용한 것처럼 보였다. 9년 전, 말레이시아에서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도 비슷했다. 대부분 정 많고, 순박하고, 따뜻했으며, 자꾸 나에게 맛있는 걸 먹이고, 뭔가를 주고, 어딘가로 데려가더니, 헤어질 땐 눈물을 쏟는 이도 있었다는 것. 사람들은 정말로 화를 내지 않았으며, 쉽게 웃음을 건네었다. 나는 나처럼 조금 느리게 걷고, 쉽게 웃고, 편하게 말을 거는 사람들을 보면서 녹아내렸다. 이곳에선 잘났든, 못났든 어떤 형태로든 사회적으로 쉽게 수용될 것 같았다.


그때를 떠올리면 꼭 꿈을 꾼 것처럼 느껴졌다. 온 우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 덕분에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개운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말레이시아에 적응을 하고나자 매일 10시가 되면 잠에 들고, 7시반이 되면 잠에서 깼다. 조금도 뒤척이지 않았고 어떤 꿈도 꾸지 않은 채로. 어릴 때부터 달고 살던 피부병은 정신을 차려보니 말끔히 나아있었다. 손톱은 건강해져 있었고. 음식도 입에 잘 맞아 매일 삼시세끼와 과일을 챙겨먹다 보니 5개월만에 살이 통통하게 올라 귀국한 날 보고 엄마가 깜짝 놀랐었다.


그 기억을 되짚어 많이 먹어 살을 좀 찌워보겠다며 야심차게 이번 여행을 계획했는데, 식중독이라니. 식도락 빠진 여행이 가당키나 한 걸까. 여행을 취소할까 고민했지만, 이번이 아니면 왠지 말레이시아를 올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더 시간이 흐르면, 내가 간직해오던 추억들도 더는 힘을 못 쓸테니 무슨 힘으로 말레이시아까지 다시 오게 될까. 그러니 지금이 맞았다. 뭐든, 지금이 옳다. 그 마음으로 노로바이러스와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시간은 새벽 4시, 인천공항 제1터미널이었다. 


공항에 도착해 입국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섰다.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아 사람 구경을 하는데. 저 앞에 보이는 검색대직원이 꽤나 잘생겼다. 남자답게 뚜렷한 이목구비에 청순한 분위기까지, 속으로 감탄을 하며 여권을 들고 서있는데.


“너무 잘생겼어.”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소리나는 쪽을 고개를 돌리니 중년의 남녀가 그를 향해 몸을 세우고는 꺄르륵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몸을 치대고 흔들며. 게다가 남자분이 더 신나보이셔서 코미디였다.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한, 그들의 솔직한 반응에 웃음이 터질까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어서 마스크를 내려달라는 그의 말에 마스크를 살짝 내렸는데, 그 순간 왠지 웃음이 새어나올 것 같아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마스크 올리기만을 기다렸다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새벽부터 열일하는 사람에게 이유 모를 수줍은 미소를 들이밀 수는 없었다. 


 신체검사, 입국심사 등 몇 가지 절차를 거치고서 마침내 입국장 안으로 들어섰다. 새벽이라 면세점 불은 꺼져있었다. 터미널에서도 한번 더 셔틀트레인을 타고 탑승구를 향해 끊임없이 걸었다. 탑승구 근처에서 잠깐 쪽잠을 자고 일어나자 아빠로부터 문자가 와있었다.     


-아빠가 음식을 이것저것 먹었더니 또 설사한다. 너 음식 조심해라. 설사하면 여행 못한다.

-먹으면 도로아미타불 조심해야죠

-아빠가 음식을 못 참은 탓이다. 너는 꼭 참아라.

-응 알겠어요. 아빠도 몸 잘 챙기고     


같이 식중독에 걸려 병원에 입원까지 해놓고 귤을 왕창 먹는 대담함을 지닌 아빠로부터 온 문자. 엄마에게 잔소리깨나 듣고서 한 문자인 것 같다. 문자에서 엄마의 말투가 묻어나온다. 웃기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뭔가 먹고자 하는 의욕마저 없는 상태였으니, 아빠만의 기우이었다. 기내식이 나와도 마치 손대지 않은 것처럼 살며시 열고 살며시 닫는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별다른 징후가 없다. 나은 것일까, 그렇기를 바란다. 옆에 앉은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어느나라에서 온 사람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 한참 남은 비행이 조금 힘들어질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작고 안 소중한 평생 사원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