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네 (Giorgione) ,1478-1510
이렇게 저렇게 36살이 되었다. 거울을 보며 한 가지 바람을 말했다. 노인이 되었을 때 그 주름이 멋있어 보이기를. 슬프면 어떡하나 생각했다. 20대의 나를 생각하면 그리운데 주름을 가진 나는 어찌나 슬플까 싶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늙어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주름은 나의 지나간 시간을 더욱 그립게 만들 것이고 지금의 내가 소비되는 시간은 무서운 것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노인이 되어서도 나는 조급한 인간으로 남게 되는 것일까.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구슬픔이 이미 36살에 찾아왔다. 한 번도 거울을 보는 순간에 시간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시계와 달력의 숫자로 보던 시간들은 거울 앞에 나로 대체된다. 지나간 시간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진다.
비 오는 베네치아의 아침 안개를 거스르며 지나가는 바포레또를 타고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조르조네의 그림을 만난 기억을 떠올린다. 그의 그림은 항상 뭔지 모를 구슬픔을 준다. 조르조네가 바라본 늙은 여인은 내가 거울을 바라보며 느꼈던 구슬픔을 연상시킨다. 늙은 여인의 자세는 살짝 비틀어져있다. 숨고자 하는 그녀의 자세에서 그녀가 바라보는 공간은 벗어나고자 하는 두려움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몸이 따르지 않고 창틀에 붙어버린 자세로 구슬프게 앞을 바라보고 있다. 그곳은 빛이 오는 공간이고 그 뒤의 공간은 어둠이다. 상상을 해본다. 완전한 어둠의 공간에 서 있는 늙은 여인은 불행한 표정일까, 행복한 표정일까. 늙은 여인은 빛이 불편해 보인다.
이 세상에 빛이 없으면 우리는 시간을 느낄 수 있을까. 늙은 여인에게 빛이 다가오고 있다. 그렇게 그녀는 우리 앞에 자신을 가리키며 서있다. 한 장의 종이가 보인다. COL TEMPO(시간과 함께).
시간과 함께 그녀는 자신의 늙은 모습을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모습조차 시간과 함께 더 늙어가고 있다. 그녀를 그린 이 그림 안의 시간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조르조네는 주름을 묻혀 우리에게 시간을 보여준다.
더 이상 그 지나가는 시간을 마주할 용기가 없기에 불안한 눈빛이지만 빛으로써의 시간은 피할 수 없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흘러가는 시간은 그녀의 시간과 만났고 우리들 앞에 시각으로 보인다. 시간에 대한 시이다. 흐르는 시간에 대한 구슬픔에 대한 회화. 이탈리아에선 조르조네 작품은 시라 말한다.
내가 거울을 바라보며 훗날 나의 늙은 모습에 대해 슬퍼하지 않길 바랬던 것은 앞으로 지나갈 시간 앞에서 나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재가 불안하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해 낭비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낭비하지 않은 자는 성공한다고 말하는 시대이다. 늙은 모습의 나는 성공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농담 삼아 이야기하곤 한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 빠르다고. 그 말을 들을 때 나는 종종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우리들은 각자 각자 다르게 변할 것이고 더 다른 자아가 된다. 나는 갓난아이를 바라보며 그 아이의 자아를 생각하진 못한다. 그렇게 아이로 돌아간다면 내가 아닌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시간)이 많이 주어질 것이다. 인간이라는 대분류는 시간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고 시간에 따라 각자의 이름을 갖는 내가 된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 구름 사이로 마지막 빛이 보인다. 그림의 배경의 다리를 건넌다면 시간은 흐른 뒤이고 이 순간의 반짝임 뒤에는 먹구름에 갇혀 빛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먹구름에 갇혀 어둠이 오는 시간은 베네치아의 도시에선 때론 끔찍하리 만큼 우울하다. 마지막 반짝임의 순간 한 청년이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을 약간의 미소와 함께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그 어둠이란 것은 이제 늙어가는 시간이고 젊은이의 시간은 최고의 아름다움을 뒤로한 채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 화가는 다가 올 어둠을 외면하고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며 정점의 아름다움을 향한 시간만이 남은 갓난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건너편의 그녀는 젊은이를 바라보지 않는다. 현재가 과거를 보고 과거가 현재를 본다고 가정해본다면 그녀는 그의 어머니가 아니다. 그는 과거를 보며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는 것이지만 과거에서 바라보는 미래의 젊은이는 그녀에겐 아들이 될 수 없다. 다가올 시간이 어떻게 그를 변화시킬지 모르기에 그녀는 알 수 없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세상의 시간을 아이에게 주는 것이다. 그렇게 여성은 모유로써 자신의 아이에게 시간을 주는 것에 노심초사하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젊은 남성의 긴 막대는 그와 발과 어머니의 발 사이의 길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가 들고 있는 막대는 그를 변화시킨 시간이며 그를 만든 기둥이다. 세워진 막대는 눕혀진 배경의 다리와 대조된다. 그의 시간은 막대처럼 세워져 있고 멈춰진 느낌이다. 무너진 건축물처럼 이제 그도 정점의 아름다움을 뒤로한 채 늙어가는 시간만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두 명의 초상화에서 시간은 가로와 세로의 이미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흘러가는 가로의 시간 위에서 과일 하나를 들고 있다. 흘러가는 시간에서 한 열매는 익었고 땅 위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것을 집은 젊은 남성은 그 익은 열매를 들고 회상의 시간에 빠져든다. 그 뒤 배경에 꽤 두꺼운 세로의 기둥이 그를 관통하고 있다. 멈춰진 시간 위에 그의 눈은 현실을 벗어난 눈동자이다. 과일을 든 그의 모습이 더 구슬퍼진다. 창문 밖으로 몸을 뺀 모습이 땅 위로 떨어진 과일의 모습과 비교된다. 그도 그가 들고 있는 익은 과일처럼 성숙함을 뒤로하고 어딘가로 추락하고 떨어질 날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열정과 힘이 가득한 뒤의 어린 청년은 그의 슬픔과 회상의 시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눈은 현실의 것을 당당하게 마주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시간 안에는 신이 없다. 조르조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신은 자연의 아들이라 말했듯이 인간은 자연의 섭리 중 하나인 시간에 예속되어 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고 자신 또한 늙어가고 과거의 시간은 활기차고 아름다웠던 시간.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인간 중심의 사상이라고 모두가 얘기한다.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조르조네란 화가는 지금의 나와 같이 지나간 시간에 대한 구슬픔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두려움을 얘기한 화가이다. 인간의 숙명을 자신의 작품 안에 자신을 그렸고 한 명의 인간을 그린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정수라고 얘기되는 조르조네는 시간이 그토록 무서웠을까 33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