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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양 Apr 21. 2024

타인의 개입을 좋아하세요?


당근 케이크는 나를 설레게 한다. 진득한 가나슈나 톡톡 튀는 레드벨벳 케이크처럼 겉보기에 특출나진 않아도, 촉촉한 시트 사이로 잘잘하게 씹히는 당근의 향과 새콤하고 짙은 풍미의 크림치즈 조합은 포크질을 멈출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내 주변엔 당근 케이크 반대파, 이름하야 반당케파가 지배적이다. 언젠가 친구와 함께 간 카페에서 당근 케이크를 주문했을 때, ‘굳이?’라는 시선과 함께 넘어갈 수 없는 견고한 취향의 벽을 마주하고 한 발짝 멀어지던 그녀를 기억한다. 그러니 누군가와 당근 케이크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주하는 건 참으로 설레는 일이다.  




다행히 테오는 당케파다. 그와 연애를 막 시작했을 무렵, 하루종일 달달한 게 먹고 싶다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다. 테오는 그런 내 손을 붙잡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그가 쇼케이스 안 당근 케이크를 바라보고 있기에 나는, 괜찮으면 이걸로 할까? 하며 선수 치듯 물은 뒤 그의 답을 기다렸다.


두구두구두구. Yes or No,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에 따라 앞으로 데이트에서 당케를 입에 올릴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테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잠시 후 영수증과 함께 돌아온 테오는 ‘다른 케이크 주문할 걸 그랬나’하며 돌연 말을 바꾸었다. 당신은 안 좋아하는데 이걸로 한 거야? 묻자 테오는 고개를 저었다.




“It’s covered with nuts. (나도 좋아하는데 견과류가 있길래.)”

“아, 견과류를 싫어해?”

“아니, your braces (너 교정기).”

“응?”

“너 아픈 거 싫으니까 그렇지.”




왜 이렇게 행간을 못 읽지 하는 표정이었다. 직접 걱정의 말을 들은 후에야 뜻을 이해한 나는 아, 어, 내 braces, 어, 고마워, 하고 뚝딱이며 시선을 돌렸다.


그를 만나러 가기 전, 교정 치료 중인 치과에 들렀다. 교정기 위에 고무줄을 덧대는 치료를 한다고 했다. 겨우 앞머리 정도 묶을만한 작은 고무줄이었지만, 치아를 조이는 위력은 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본격적인 통증은 저작운동과 함께 시작됐다. 같은 날 점심, 평소대로 햄버거를 크게 베어무는데 앞니의 뿌리를 타고 엄청난 고통이 전해졌다. 누군가 멍든 잇몸을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는 것처럼 지독한 아픔이었다.


결국 테오에게 접시와 나이프를 부탁했더란다. 각설탕 크기로 햄버거를 잘라 빵, 고기, 채소를 따로따로 어금니 사이에 끼워가며 먹었다. 음식을 씹는다기보다 뭉개듯 짓누르기에 가까웠다. 겨우 절반쯤 먹었을 무렵, 테오는 세트로 온 감자튀김까지 해치우고 뒷정리 중이었다.




-집에서 먹길 잘했다, 나 때문에 한참 기다렸겠어.

-기다리면 되는 거였지.




캐나다 교포인 그의 한국어는 음절마다 리을이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부드럽다. 이따금씩 어색한  한국어 문장들이 되려 더욱 충만하기도 하다. 테오는 한쪽 턱을 괴고 음식을 끝내지 못한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을 살피는 시선을 환기시키려 그에게 내 음식을 권했다.





-이거 먹어봐. 파인애플 들어갔는데 엄청 맛있다.




그는 내가 내민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더니 맛있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에 꽤나 까다로운 그의 긍정에 그치? 그치? 팔랑대던 나는 곧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햄버거를 떨구었다. 방정을 떨다 멍청하게 윗니와 아랫니를 서로 부딪힌 것이다. 치아 뿌리부터 찌르르 울리는 통증에 한참 턱을 부여잡고 있자 테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죽 먹자니까.

-아니, 아플 때일수록 맛있는 거 잘 챙겨 먹자가 내 신조야.

-이렇게 아파하면서까?

-같이 맛있는 거 먹어야지. 가뜩이나 주말밖에 못 보는데.

-난 죽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

-난 별로.

-아픈 거 싫다고.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요소들로 들어찬 풍광이었다. 그의 물건들로 가득 찬 아직은 낯선 공간, 앞 건물에 가려져 절반쯤 드리워지는 창가의 햇살, 눅눅한 여름 습기에 짙게 물든 몬스테라, 커다랗고 투박한 스피커,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노래들. 조금은 섣부른 관계. 살짝은 어색한 분위기. 내 허리를 감싼 테오의 팔뚝. 희고 두껍고 따뜻한 타인의 감촉, 찌그러뜨린 미간과 코 사이 잘잘한 주름이 나를 향한 걱정이라는 것까지….



그러나 가장 이질적인 것은 그 모든 걸 감당하고 있는 나, 타인으로부터 오는 모든 낯섦을 용인하고 있는 나였다. 다 먹었어? 우물거리던 입을 멈추자 테오가 물었다. 응, 잘 먹었습니다. 그대로 테오에게 몸을 기대자 다음엔 죽 먹자, 그가 가만가만 속삭였다. 싫어, 하고 답했지만 싫지 않았다. 다정한 타인의 개입이 싫을 리 없었다.


*


지이이잉-.


대차게 울리는 진동벨에 기억에서 빠져나오면, 테오는 벌써 벨을 들고 카운터로 향하고 있다. 혀 끝으로 입안의 쇠줄을 건드리며 그의 뒷모습을 좇는다. 오묘한 기분이다.


저 남자는 곧 쟁반을 들고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올 것이고, 나와 케이크를 나눠 먹을 것이고, 내가 무어라도 되는 냥 애정을 담아 날 바라볼 것이었다. 그건 단순한 상상이 아니었고, 나는 그 사실이 낯설었다. 당연하게 테오는 내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고 내 앞에 뜨거운 커피를 내려두었다.




“Be careful, it's hot.(뜨거우니까 조심해.)




덤벙댈까 어김없이 말을 덧붙인다. 그리고는 포크를 들어 당근 케이크의 표면을 썰어낸다.


nuts는 안됩니다, 먹지 마세요.

나는 입술을 삐죽였지만 단호한 그의 포크질이 밉지 않았다. 속살만 남겨진 케이크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부드럽게 시트가 녹아내렸다. 역시, 당근 케이크는 나를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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