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주제지만 나에게는 유레카!
영화 소울을 보았다.
평범하게 시작해서 중간에는 중압감을 느끼면서 영화를 보았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인가'라는 엷은 스트레스를 갖고 영화를 보았지만, 결국 영화는 거대한 반전으로 내 인생의 빈 곳을 채워주는 흔적을 남겨주고 떠났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면 영혼이 생각이 나고, 영혼을 떠올리면 광활한 우주를 헤매는 한 빛이 떠오른다.
왠지 죽음의 이후에는 가벼운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가고, 신비로운 우주의 빈 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나 스스로를 생각하게 된다. 죽음이 영원한 종말이 아니라 육신에 갇힌 내 영혼에게 자유를 주는 시작점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죽음이 두려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한 이별을 하는 것, 그거 하나 때문에 너무 슬프고 잔인하다고 생각할 뿐 나는 그 외의 것들은 밝은 생각들로 죽음의 이미지를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생을 매 순간 즐기고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영화의 교훈도 잘 알겠지만, 사실상 매 순간을 즐기기에 삶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따뜻한 날씨가 일 년 중 몇 번이나 되며, 따스한 햇살과 적정한 습도의 환경에서 내가 무언가 포근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은 또 얼마나 희박한가. 건조한 사무실에 갇혀 매일을 숫자와 씨름하는 나의 일상에서 삶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과연 무엇이 있을까.
"많지 않다."
생각보다 일상은 루틴 하고 건조하다. 사람들은 자극과 행운을 쫓고 화려한 미래를 마음속에 간직한 채 하루를 살아가지만, 사실상 어쩌면 우리는 이미 진리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이미 유유히 유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현실 안에 분명 해답은 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내가 부유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방법, 내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 등 내가 고민하는 많은 문제의 답을 현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먼 미래에 그 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기대감으로 매일을 살아간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림은 나에게 행복의 전부였다. 회사일을 마치고 쓰러질 듯 피곤해도 화실에 가서 큰 이젤 앞에 나 자신을 놓으면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빈 캔버스 앞에서 스케치를 하고 색을 입히면서 공간을 채워가는 그 순간은 나에게 만성 어깨 통증을 주었지만, 나 자신은 마음이 꽉 찬 행복감으로 매일을 설레게 살았다. 그런 순수함이 나를 좋은 학교의 대학원 석사과정으로 이끌어주었고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유수의 교수들 앞에서 내 그림에 대한 크리틱을 받으면서 나는 좀 더 대중에 먹힐만한, 혹은 좀 더 트렌드에 맞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의 끝, 즉 내 그림을 통해 유명해지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고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보상과 기타 등등의 명예를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옳지 않다는 깨달음과 이 과정을 깨야한다는 생각이 이제 천천히 들기 시작한다. 나는 하루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그림을 선택했고, 그래서 비전공자의 어설픈 기술이 오롯하게 드러나지만 아이같이 순수한 색감이 내 그림을 화려하게 빛나게 해 주고 잇었다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내가 어떤 무언가를 해야 결국 행복한 내 모습에 도달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행복한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겨야 한다.
나는 그 행복을 느끼는 것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돌이켜보면 그 모든 과정은 결국 나에게 가장 좋은 결과와 분에 넘치는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행복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사념적이다.
행복하게 사는 법은 그냥 아주 간단하다.
"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가?"
나는 이것을 고민하고, 그 결과를 행동에 옮기면 된다.
그럼 그 인생은 나를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이끌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