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그림이 보고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있고, 인간의 욕망이 진화하는 순서가 보입니다.
인생, 가장 꽃이피는 정점에서부터 모든 꽃잎이 시들어 떨어지는 낙화시점까지 렘브란트는 모든 것을 경험했습니다. 인간의 삶이 예측 불가능하고 다이내믹하다고들 하지만 렘브란트의 인생은 일반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렘브란트는 빛의 화가라고 많이 불리어집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마치 아주 강한 샷 조명으로 한 곳을 강하게 비추는 듯한 화법을 많이 구사합니다. 우리가 연극을 보기 위해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 들어가 배우의 연극을 보고 있는 느낌, 그 순간처럼 말이죠.
그러나 그의 작품은 이상하게 연극같지 않고 짜여져 있는 각본 같지 않습니다. 마치 화법의 기교는 연극과 같은 방법을 썻는데 이상하게 그의 그림은 진실과 현실을 강하게 전달해 줍니다.
위의 그림은 누가복음 15장 말씀을 묵상하며 렘브란트가 그림을 그린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입니다. 온 몸이 쇠약해지고 가진 것이 없던 렘브란트 노년의 시절을 장식한 이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괜시리 삶에 대한 무게와 인생의 마지막이 어렴풋하게 느껴집니다.
신발이 벗겨진 탕자의 발에서 느껴지는 쉴새 없이 달려온 현실의 고단함,
얼굴 조차 들지 못한 채 그저 아비의 품 속에 안겨만 있는 탕자의 가여움,
그런 탕자의 삶에 대해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넉넉한 품을 내어주는 아비의 자비로움과 노쇄함,
인생의 뒤안길에서 한번 쯤 이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면 저는 아마도 이런 말을 읊조렸을 것 같습니다.
"모든 인생을 뒤로하고 주님 품에 돌아간다면 저도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렘브란트는 초기작보다 후기작의 명성이 더 높은 작가입니다. 날이 갈수록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던 그의 삶과는 반대로 그림은 더욱더 깊어지고 솔직해졌습니다.
저에게 누군가 어두운 밀실에서 단 하나의 그림과 조우하라고 한다면 전 렘브란트의 마지막 자화상을 갖고 들어갈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잠시 렘브란트의 그림을 화면에 띄워놓고 그의 눈, 그의 눈동자, 그의 입술, 그의 살결, 머리카락을 찬찬히 훑어보시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흔히 그림이 다가와 말을 건다고 하는 표현이 있죠.
렘브란트의 그림은 그런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노년기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이곳에 적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인생에 겸허해지고 영혼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렘브란트는 항상 영혼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있던 사람이었고, 시간이 지나고 죽음의 문턱에 서서히 다다르는 그 순간 비로서 자신의 본 모습을 마주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죠.
세상 삼라만상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전세계 수십억 인구중 같은 모습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쌍둥이를 제외하곤 말이죠) 눈, 코, 입, 귀 등 얼굴에 달려있는 것은 손가락 다섯개를 넘지 않는데 어쩜 이렇게 같은 사람이 단 한명도 없을까요?
모습이 다른 만큼 생각하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도 모두 다릅니다.
렘브란트는 영혼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 경험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저는 렘브란트처럼 사색적이지도 않고, 제 안에 있는 영혼을 스스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공허함이 느껴질때마다 렘브란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네, 저에게는 그런 날들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그림을 그냥 가만히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은
그런 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