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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Aug 16. 2022

인생이 무의미하다 느껴지는 이유

톨스토이 고백록 #2 - 우물 속 나그네

1. 입대하기 일주일 전 마지막으로 쓰고 가는 글. 좀 더 쉬려고 했지만, 이 글만큼은 꼭 다 완성시키고 싶었다. 그만큼 시간을 보내는 게 무료했던 것도 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너무 사랑하게 된 책이다.

2. 글이 조금 길어질 것 같아 파트별로 좀 나눠봤습니다. 이 글의 제목과 결론이 책 전체의 결론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

3. 나는 여러 가지 이유들로 아아아주 행복하고, 내 인생에 있어 자살은 거리가 멀어도 너어어어무 멀다.
(그러니 독자분들께서 내가 이런 글을 썼다는 이유로 자살충동을 느끼고 있다 생각하면 아주 많이 곤란함)


톨스토이는 그의 고백록에서 한 우화를 들려주었다.


"초원에서 미쳐 날뛰는 맹수의 습격을 받은 나그네에 대한 동양 우화가 이미 오래전부터 회자되고 있다. 나그네는 맹수를 피해 물이 없는 우물 속으로 뛰어들지만, 우물 밑바닥에서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용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 불행한 나그네는 미쳐 날뛰는 맹수에게 잡아먹힐까 봐 감히 밖으로 기어 나오지도 못하고, 용한테 잡아먹힐까 봐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가지도 못한 채 우물 틈새에서 자라는 야생 관목 나뭇가지를 붙잡고 매달려 있다. 두 팔의 힘이 약해진 그는 양쪽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에 곧 몸을 맡길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계속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고, 매달려 있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다가 검은쥐와 흰쥐 두 마리가 관목 줄기 주변을 일정하게 갉아먹고 있는 것을 본다. 이제 관목은 저절로 부러져 떨어질 테고, 그는 결국 용의 입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나그네는 이를 보면서 자기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동안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관목 잎사귀 위에서 몇 방울의 꿀을 발견하고 혀를 내밀어 핥는다."


나그네인 우리는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우물 위로는 미쳐 날뛰는 맹수가, 아래로는 입을 벌리고 있는 용이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든 온몸에 힘을 주고 나무에 매달려 생명을 연장해보지만,

그 힘을 다하는 순간 혹은 쥐들이 그 나무를 모두 갉아먹는 순간 우리는 결국 죽는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잎사귀 위에 있는 몇 방울의 꿀을 핥는 것,

우리가 삶 속에서 맞이하는 찰나의 기쁨들을 누리는 것뿐이다.

이 우화를 들려주며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우화가 아니라 진실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모두가 이해하는 진리다.
용의 공포를 느끼지 못하게 했던 삶의 즐거움에 대한 예전의 망상은 더 이상 나를 속이지 못한다. 너는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으니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살라고 아무리 내게 말을 할지라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중략)
무엇보다 더 오랫동안 잔혹한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해던 두 방울의 꿀, 즉 가족에 대한 사랑과 내가 예술이라고 불렀던 문필업에 대한 사랑은 내게 더 이상 달콤하지 않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더 이상 그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했던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결국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모두 사람이고, 그가 처한 동일한 상황 속에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큰 절망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 사랑에 대하여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왜 그들은 살아가야만 하는가? 왜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아끼며, 양육하고, 보호해야만 하는가? 내 안에 있는 그 절망을 위해서일까, 아니면 어리석음을 위해서일까?


예술과 시에 대한 그의 사랑은 과거 그의 삶에 가장 달콤한 꿀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를 더 이상 즐겁게 해 줄 수 없었다.

나의 삶이 의미가 있다고 내 스스로 진심으로 믿었을 때, 나는 예술 속에 비친 내 삶의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다. 당시 빛과 그림자들의 유희, 즉 희극적이고, 비극적이며,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무시무시한 삶의 유희가 날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삶이 무의미하고 무섭다는 것을 알았을 때, 거울 속의 유희는 더 이상 날 즐겁게 하지 않았다. 나의 버팀목을 갉아먹고 있는 용과 쥐들을 보았을 때, 그 어떤 달콤한 꿈도 내게는 감미로울 수 없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톨스토이의 생각에 대해서는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도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있어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사랑하게 될 아이가 이 고통스럽고 추악한 세상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싫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그들이 처한 삶의 환경도 고통의 연속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 모두는 고통의 연속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인생 속에서 의미를 계속해서 찾기 위해 고전했다.


"'그러나 내가 무언가를 보았지만, 이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자신에게 여러 번 되뇌고는 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태가 사람들에게 일반적일 수는 없어.'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얻은 모든 지식 속에서 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했다. 나는 고통스럽게 오랫동안 답을 찾았고, 즐거운 호기심 때문에 아니라 정말 열심히, 고통스럽고 끈질기게 밤낮으로 찾으려 했다.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구원을 찾듯이 찾아 헤맸지만 나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는 그가 무지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학문과 지식에 눈길을 돌렸다.

삶의 여러 의문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지식의 한 분야인 생리학, 심리학, 생물학, 사회학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의문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때, 그저 인간의 지력에 활홀해할 뿐,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한다고 결론지었다.


"이 분야의 지식은 삶의 의문을 간단히 무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도대체 무엇이며, 당신이 왜 사는지에 대해 우리는 답을 갖고 있지 않고, 이런 문제에 관심도 없다. 그런데 당신이 빛의 법칙, 화학적 결합의 법칙, 유기체의 발달 법칙을 알 필요가 있다면, 만약 당신이 신체의 법칙, 신체 형식의 법칙, 수와 양의 관계를 알 필요가 있다면, 당신이 자신의 마음의 법칙을 알 필요가 있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명확하고 의심의 여지없는 답들을 갖고 있다.'
(중략)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난 학문이 그토록 집요하게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삶의 의문에 대한 대답은 이 길 위에는 없다."


그가 이 지식의 분야에서 찾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 하나였다.  
바로 '삶은 무의미하다'였다. 심지어 그들의 답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능한 온갖 의미를 없애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너는 네가 너의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너는 미립자들의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결합이다. 이 미립자들의 상호작용과 변화가 네가 너의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네 안에서 생산한다. 이 결합은 잠시 잔존할 것이다. 그다음에 이 미립자들의 상호작용은 멈출 것이고, 네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도 정지할 것이다. 그럼, 너의 모든 의문도 끝날 것이다. 너는 무언가가 우연히 결합된 작은 덩어리다. 이 작은 덩어리는 현재 분해되고 있으며, 이 덩어리가 분해되면서 부글부글 끓는 것을 생명이라고 부른다. 이 작은 덩어리가 완전히 분해되면 생명도 끝나고, 모든 의문도 없어질 것이다.'
명확한 관점의 지식은 이렇게 답한다. 만약 이 분야의 지식이 그 나름의 원칙을 엄격하게 지킨다면, 다른 답변을 할 수가 없다"


이 말에 필자는 100% 동의한다. 

2년 전, 리차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을 본 것이 기억난다.

40억 년 전, 우연히 만들어진 무기물로 구성된 따뜻한 연못 속의 작은 입자들이 서로 우연히 부딪히면서 '자기복제를 하는 분자'가 탄생하게 되고, 그 분자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복제하던 과정 속에서 우연한 오류로 인해 불완전한 복제품이 탄생하고, 그렇게 해서 생명의 다양성이 발현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우리 안에 있는 자기복제자들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생존기계일 뿐이며, 우리가 느끼는 모성애도 그저 복제품을 지키기 위해 자기복제자가 뇌에 입력해둔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그의 말이 생각난다. 그리고 지난 학기 대학교에서 원숭이가 그의 종의 생존을 위해 진화했다는 내용을 가르치는 생물학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래. 그들의 말이 과학적으로 입증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과학자들에게 맡겨두고, 만약 리차드 도킨슨과 생물학 수업 교수님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만약 우리 인간이 그저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우연히 탄생한 자기복제를 하는 분자들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생존기계같은 존재라면, 우리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도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설정된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그저 생존을 위해 원숭이로부터 진화된 동물에 불과하다면, 우리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지? 이렇게 우연의 연속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인생이 스트레스의 연속이고 갈등과 아픔의 연속이라면,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마침내 이룬 성공을 한다 해도 결국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맹수에 의해 모두 잃게 된다고 하면, 왜 우리는 살아가는 거지?'


나는,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환호하는 과학과 학문에서 어떠한 삶의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톨스토이는 결국 지식의 다른 분야인 철학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답은 '무의미'였다.


"다음은 인간의 지혜가 삶의 의문에 대해 대답할 때 주는 솔직한 답들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육체의 삶은 악이자 거짓이다. 따라서 이 육체의 삶을 없애는 것이 선이고, 우리는 이 선을 갈망해야만 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삶은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악이다. 그러므로 무無로의 전환은 삶의 유일한 선이다.'
    솔로몬이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 즉 어리석음도, 지혜도, 부도, 가난도, 즐거움도, 고통도 모두 헛되고 하잘것없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부처가 말했다. 
    '고통, 연약함, 늙음, 죽음의 불가피성을 의식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을 삶에서, 삶의 온갖 가능성에서 벗어나게 해야만 한다.'
    이 위대한 현자들이 한 말은 그들과 비슷한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느낀다."


톨스토이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수 많은 지식 속에서 방황했지만, 그 시간은 그를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그의 결론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지식 속에서의 나의 방황은 나를 절망에서 빼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절망을 더 키웠을 뿐이다. 어떤 지식은 삶의 의문에 대답하지 못했고, 다른 지식은 나의 의문에 대답했지만 나의 절망을 직접 확인해 주었고, 내가 도달한 결론이 나의 망상이나 병적인 정신 상태의 결과가 아님을 보여 주었다. 반대로, 다른 지식은 내 생각이 옳았고 인류의 가장 위대한 현자들의 결론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내게 확인시켜 주었다. 




여기까지가 톨스토이의 고백록 4장 중반부터 6장까지의 내용이다.

이 엄청난 여정의 끝이 절망이었음에도 톨스토이는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7장에서는 이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4가지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그 이후로부터는 조금씩 조금씩 지금까지 그를 절망으로 빠뜨린 시간 속에서 오류를 발견하게 된 계기를 나누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마침내 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찾게 된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 결론이 매우 불만족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아가보길 바란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결국 결론을 내려야 하는 우리 인생이 걸린 질문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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