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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Aug 18. 2022

인생을 사는 4가지 방법

톨스토이 고백록 #3 -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

미쳐 날뛰는 맹수의 습격을 받은 한 사나이가 있다.

그 사나이는 맹수를 피해 물이 없는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그 우물 밑에는 그를 잡아먹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는 용이 있었다.

사나이는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우물 틈새에서 자라는 야생 관목 나뭇가지만을 붙잡고 매달려 있다.

그러나 팔의 힘은 점점 빠져만 갔고,
그나마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던 나무줄기마저 쥐들이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그는 그가 결국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관목 잎사귀 위에서 몇 방울의 꿀을 발견하게 되고,

그는 혀를 내밀어서 그 꿀을 핥기 시작한다.


톨스토이는 이 우화가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는 여러 학문을 접하고 배우면서 많은 고찰의 시간을 가졌지만,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자신을 기만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헛되다. 태어나지 않은 자가 행복하고, 죽음이 삶보다 더 낫다. 그러므로 삶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챕터 6)" 


학문과 지식을 따라갔을 때에 그 끝에는 '무의미'라는 답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주변 사람들의 삶 속에서 다른 희망을 찾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계층에 있는 이들이 이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네 가지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 무지의 방법

이 방법은 말 그대로 삶이 악이고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아주 젊거나 혹은 아주 어리석은 자들이 속해 있다고 톨스토이는 말하고 있다.

그는 앞서 말한 우화에 빗대어 이 무지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용도 보지 못하고, 자신이 붙잡고 있는 관목을 갉아먹고 있는 쥐들도 보지 못한 채 꿀방울을 핥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잠시 꿀방울을 핥을 뿐이다. 뭔가가 그들의 주의를 용과 쥐들에게로 돌릴 것이고, 그러면 꿀방울 핥기도 끝이 난다. 그들에게서는 배울 게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계속 알아야만 한다. (챕터 7)"


두 번째: 쾌락의 방법

이 방법은 삶이 절망임을 알고 있음에도 잠시 현재의 행복을 만끽하며 용도 쥐들도 무시하는 것이다. 

또한 관목에 꿀이 많이 있을 때에는 최선의 방법으로 꿇을 핥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사람이 관목의 꿀, 다시 말하자면 현재의 쾌락이나 지위 혹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점이 아니라는 사실과 지금 나의 관목에서 흐르는 꿀이 언제든지 끊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각자가 천 명의 아내를 소유하면 천 명의 남자에게 아내가 없고, 궁전 하나를 세우려면 천 명의 남자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리고 오늘의 나를 솔로몬으로 만든 우연성이 내일에 나를 솔로몬의 노예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이런 사람들은 상상력이 둔감해서 부처를 불안하게 했던 것, 즉 머지않아 이 모든 즐거움을 파괴할 병과 늙음과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해 잊는다. 이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자신의 둔감한 생각과 상상력을 소위 실증 철학이라고 단언한다. 내 생각에 그들은, 문제를 보지 못하고 꿀을 핥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챕터 7)"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 중 아무리 못해도 절반 이상은 이 무지의 방법과 쾌락의 방법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그들에게 "나는 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은 고리타분하고 따분하며 실용적이지 못한 잡생각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현재의 상황 속에서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고, 더 많은 쾌락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도 그들의 삶의 의미에 대하여 질문하게 되는 날이 찾아올 것이다. 


세 번째: 힘과 활력의 방법

이 방법은 삶이 악이자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 삶을 파괴하는 방법이다.

최근 들어서 이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 같다.

"자신들을 웃음거리로 만든 온갖 어리석은 장난을 깨닫고 나서, 죽은 자들의 행복이 산 자들의 행복보다 더 크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깨달은 그들은 이에 따라 행동하고, 즉각적으로 가용한 수단들(목을 맬 올가미, 물, 심장을 찌를 칼, 철로의 기차 등)을 사용하여 이 어리석은 장난을 끝낸다. (챕터 7)"


네 번째: 나약함의 방법

이 방법은 삶이 악이고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삶에서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삶을 계속 끌고 가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이 이 방법에 속해 있었다고 말한다.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죽음이 삶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합리적으로 행동할 힘이 없고, 빨리 기만적인 삶을 끝내거나 자살할 힘이 없어서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나약함의 방법이다. 내가 더 좋은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내 손안에 있다면, 왜 내가 더 좋은 것에 몸을 맡기지 않는가 나는 이 부류에 속해 있었다. (챕터 7)"




그런데, 이렇게 절망에 빠져 있던 와중에도 그는 그의 추론과 생각이 틀렸기를 바라고 있었으며, 그의 추론의 출발점과 그것의 진정성을 어렴풋이 의심하고 있었다.

그의 이성은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결론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런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다.

"'삶은 무의미한 악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나는 살아왔고, 여전히 살고 있다. 전 인류도 살아왔고, 여전히 살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왜 인류는 살지 않을 수 있는데, 여전히 살고 있는가? 쇼펜하우어와 나만이 삶의 무의미와 악을 깨달을 만큼 지혜로운 것일까?' (챕터 7)"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이성적인 확신은 완전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에 그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볼 때에는 그의 동료들로 구성된 한정된 집단만을 바라보았으며, 이는 학자들, 부자들, 한가한 사람들로 구성된 한정된 집단이었다. 

반대로 그는 그 이외의 수십억 명의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나의 삶과 솔로몬과 쇼펜하우어의 삶이 진실하고 정상적인 삶인 데 반해 수십억 명의 삶은 주목할 가치고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찌 그렇게 오해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너무나 이상하게 보이지만, 당시엔 정말 그랬었다. 지적 오만의 미망 속에 빠져 있던 나는, 나와 솔로몬, 쇼펜하우어가 너무나 올바르고 진실하게 문제를 제기해서 다른 문제 제기는 있을 수 없다고 느꼈다. (챕터 8)"

놀랍게도, 톨스토이가 무시하던 이들(농부들 그리고 노동자들)은 톨스토이가 그토록 찾던 '삶의 의미'에 관한 지혜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삶의 의미를 의심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들 중에는 그들의 삶이 시작될 때부터 삶의 의미를 이해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을 만나면서, 톨스토이는 처음으로 그의 이성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들을 쾌락주의자들로 분류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삶은 쾌락보다는 결핍과 고통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들을 무의미한 삶을 비이성적으로 사는 사람들로 간주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삶의 모든 행위와 죽음 자체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살을 가장 큰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전 인류는 내가 인정하지 않았고 경멸했던 삶의 의미에 대한 어떤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지식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삶을 배제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반면에 수십억 명의 사람들, 전 인류가 삶에 부여한 의미는 지금껏 경멸당하고 거짓이라고 여겼던 지식에 기초하고 있다.
학자들과 현자들로 대표되는 이성적 지식은 삶의 의미를 부정하지만, 수많은 대중과 전 인류는 삶의 의미가 비이성적 지식 속에 있다고 인정한다. 이 비이성적 지식은 내가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로 그 신앙이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신이며, 엿새 동안 창조된 피조물, 악마들, 천사들, 그리고 내가 미치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든 것들이다. (챕터 8)"

그는 삶의 의미를 '비이성적 지식'에서 발견했고, 그 지식은 바로 신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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