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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Nov 09. 2022

서문 - 날이 새도록 그와 씨름하다

Prologue 1

해당 글은 원고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수정되고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느낀다.”



    이 짧은 한 문장을 읽는 순간에 느낀 감정을 잘 기억하길 바란다. 기쁨, 확신, 원망, 모호함, 수치심, 무관심 등 어떤 감정을 만나던 상관없다. 다만, 이 짧은 문장에서 모두가 같은 기분을 느낄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한 독실한 신자가 있다. 그는 기도를 할 때면 그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주변의 상황과 환경이 변화된다고 느낀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면 그 설교 내용이 유독 자신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다고 느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절실하게 기도를 하거나 손을 들고 찬양을 할 때 기쁨과 슬픔이 섞인 눈물을 흘린 적도 많다고 한다. 이러한 크고 작은 경험들이 그에게는 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해주는 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아니 애초에 신이라는 존재에 관심이 없는 그의 친구는 이 '느낌'이라는 단어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친구에게 영적인 경험이란 그저 만들어진 신으로부터 비롯된 망상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한 삶의 변화는 그저 플라시보 효과와 비슷한 심리적인 반응 정도, 설교 내용이 그가 처한 상황에 딱 들어맞는다 느끼는 것은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유명한 사람들의 강연을 듣다 보면 비슷하게 느낄 수 있는 흔한 경험 정도, 그리고 손을 들고 찬양할 때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꾹 참아왔던 눈물을 신이라는 가상의 존재 앞에서 터트리는 행위 정도로 보인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신앙은 대게 주관적인 경험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경험이 받쳐주는 신앙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지 않게 해준다. 그러나 개인의 경험주의가 받쳐주는 신앙이 아닌 합리성이 받쳐주는 신앙, 다시 말하자면 이성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신앙을 필요로 하는 순간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단순히 '느낌'이라는 단어로 설득하는 신앙이 아닌 '합리적으로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신앙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이런 공격적인 질문을 던진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진화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왜 이리 아프고 슬픈 것인가?

    그 구원의 통로라는 기독교는 왜 폭력과 압제의 역사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는가?  

세상에는 수 천 가지의 종교가 있는데, 그중에서 왜 하필 기독교만이 구원의 통로라고 주장하는가?


   나는 앞으로 이 책에서 위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하나씩 펼쳐 볼 것이다. 어떤 이들은 위의 질문들에 대한 고민 끝에 ‘이러한 것들 때문에 나는 신을 거부한다’라고 결론짓지만, 나는 해당 질문들에 관한 똑같은 고민의 시간을 거쳐서 ‘이러한 것들 때문에 나는 더더욱 무신론을 거부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세상은 주변에 넘쳐나는 고통을 근거로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만, 나는 그 고통을 이유로 신을 선택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러한 결론과 그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나눠볼 것이다. 


   혹자는 우리가 갖는 신앙적인 의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인생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나는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러니 설령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더라도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니까 그것을 믿는 믿음이 가장 중요해." 아주 멋있는 고백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고백에서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이와 같은 믿음의 고백보다 그 믿음의 길을 가로막는 다양한 논제들에 대한 변증이 더 시급하다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약 독자가 진정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초대하길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변증의 의무를 더 이상 묵인하며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지금쯤 온몸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만 신앙인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이들이 '느낌'이라는 단어에만 의존하여 신학에 대해 어떠한 탐구와 고민도 없이 그저 맹목적인 믿음으로 신앙을 이어 나가는 동안, 교회 밖에서 떠돌던 이들은 결국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신을 떠났고, 창조론을 상대할 가치도 없는 비상식적인 가설이라 생각하게 되었으며, 부패한 교회와 목사라는 캐릭터를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현실적인’ 클리셰라고 느끼게 되었다.


   기독교인이 기독교 변증을 회피하는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변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변증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은 변증 없이도 그들이 지금까지 완만한 신앙생활을 이어왔기 때문에 불필요하다 느끼는 것이고, 두려움을 가진 이들은 기독교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난제들이 그들이 해결하기에 너무나도 높은 벽으로 느껴지기에 차마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진화론을 반박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세상에 왜 이리 고통이 많은지를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에 결국 변증의 의무를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에 묻어 둔 채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배움의 의지를 잃어버린 이들을 향해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지도가 색칠한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여러분이 지도에 관해 기억해야 할 사실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지도가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진짜 대서양을 향해하면서 발견한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그 지도의 이면에는 해변에서 바다를 본 당신의 경험 못지않게 생생한 경험의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한 당신의 경험은 바다를 고작 한 번 흘낏 본 것이 전부지만, 지도는 서로 다른 경험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둘째는, 여러분이 어딘가 가고자 할 때는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해변을 거니는 데 만족한다면 지도를 보느니 해변에서 직접 바다를 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고 싶다면 해변을 거니는 것보다는 지도를 보는 편이 훨씬 유용할 것입니다.
신학은 지도와 같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거기에 대해 생각하는 데서만 멈춘다면, 그 장교의 사막 경험보다 생생하지도 않고 흥미롭지도 못할 것입니다. 교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일종의 지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지도는 정말 하나님을 만났던 수백 명의 경험-여기에 비하면 여러분과 제가 혼자 경험하는 흥분이나 경건한 감정들은 아주 초보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더 먼 곳에 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지도를 써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막에서 그 장교에게 일어난 일은 분명 흥미진진한 실제 경험이긴 하지만 열매는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야 말로 막연한 종교-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식의 것들-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입니다. 그런 종교에는 흥분만 있을 뿐 결과가 없습니다. 해변에서 파도를 구경할 때처럼 말이지요.
그런 식으로 대서양을 연구한다고 해서 뉴펀들랜드에 갈 수 없는 것처럼, 꽃이나 음악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¹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바다에 가 보지 않고 지도만 들여본다고 해서 어디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도 없이 무조건 바다에 나가는 것 또한 그리 안전한 일은 못 되지요"


    부디 오해가 없길 바란다. 경험 그 자체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두 말할 것도 없이 귀한 것이다. 성경도 우리에게 신을 처음으로 믿게 되었던 그 순간의 열정을 회복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치와는 별개로 그가 믿는 신적 존재와 그 존재가 만든 세상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잃은 채 그저 과거에 신을 만났던 짧은 순간들, 그리고 그때 느낀 감정과 종교적 흥분에 의존하여 신앙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기독교는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랑을 강조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의미의 사랑은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의지의 상태이다. 설령 누군가가 평생 동안 경건한 감정을 느끼며 살 수 있다 해도 (물론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감정은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든 인간을 향한 사랑이든, 기독교적인 사랑은 의지(will)의 영역이다. 그러니, 부디 가만히 앉아 억지로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지 않길 바란다. 대신 의지적으로 스스로에게 물어봐라. "만일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그리고 그 때 떠오르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신학을 강조하고 싶다. 신학은 말그대로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하고 정확한 개념을 얻고 싶어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의지를 펼쳐야 한다. 신학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그에 대한 개념들을 배우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주장은 곧 자신이 사랑하는 신에 대해 끔찍한 오해를 품고 살아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지금부터 함께 그려갈 지도는 다른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들이 그려낸 지도에 비하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지도일 것이다. 그러나, 부디 신을 거부한 이들에게는 앞으로 그려나갈 신학이라는 지도가 그들이 모르는 바다가 실존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림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신을 알고 있으나 그 신을 향한 변증의 의무를 거부하며 살아온 이들은 이 지도를 통해 그들이 이전에 해변가에서 직접 본 바다 너머에 있을 위대함을 보게 되길 바란다.




¹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pg.24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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