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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Nov 23. 2022

서문 -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

Prologue 2

해당 글은 원고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수정되고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이전 서문에서는 지식의 근원을 감각의 영역에 두고 그 감각적인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지식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경험주의가 신앙의 변질로 이어지거나 아예 신앙을 무너뜨릴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나누었다. 하지만, 경험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는 합리주의 또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그리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합리주의, 즉 모든 것을 이성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비과학적이거나 비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에 지나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경험주의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리를 추구하는데 큰 방해가 될 것이다.


   물론 인간의 이성이 꽃피운 자연과학이라는 학문과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발전이 지금의 인류를 만드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이성은 믿음과 이해의 선순환을 만드는 핵심이다. 이성적 접근을 통해 자신이 믿어왔던 무언가가 정말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이전보다 더 견고한 믿음을 가지게 되고, 이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또 다른 연역적 사고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극단적 이성주의와 그것의 부산물인 과학만능주의는 이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과학주의는 인간의 학문으로 증명될 수 없는 개념을 대게 비논리적이고 불가능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과학주의는 이미 수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무너졌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연하다고 믿는 수많은 사실들 중 상당수의 실상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학이라는 개념은 과학의 전제가 될 수는 있지만 과학에 의해 증명될 수는 없다. 그리고 윤리 -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악한 것인가 - 를 과학이 판단해줄 수는 없다. 우리가 "아름답다"라는 감정을 느끼는 기준 또한 인간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심지어는 우리가 과학적 원리라 부르는 것들 중에서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수 많은 과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우리는 '과학'이라는 학문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정리이자 ‘인간의’ 인식능력으로 수집한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자연의 모든 면모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의 감각과 인간의 지능 안에서 볼 수 있는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탁자 위에 커피가 한 잔 있다고 상상해보아라. 검은색 음료가 (인간이 느끼기에)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그 커피를 담고 있는 컵을 만지지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컵을 한쪽으로 조금 기울여보니 그 안에 있는 커피도 당신의 예상대로 움직인다. 이렇게 다양한 인식들이 모여 우리는 그 컵 안에 있는 것이 커피라는 사실을 알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인간에게 오감이 없었다면 혹은 지금의 인간의 지능이 없었더라면 커피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커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마치 박쥐에게 커피 한 잔은 그저 초음파 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커피 대신 고통이라는 개념은 어떤가? 우리는 뉴스를 통해 끔찍한 사건들이 전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지닌 지능과 감각을 통해 그 모든 사건들을 "고통"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하며 탄식한다. 마치 박쥐가 커피를 그저 초음파 덩어리로밖에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끔찍한 사건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재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의 이성으로 세상의 모든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큰 지적 오만이다. '시간'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곧장 따라가야 하는 직선이라고 한다면, 신은 그 직선이 그려진 종이 전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얇은 직선 안에서 살아가는 삶조차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우리가 그 직선은 비교대상조차 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영역을 전부 이해할 수 있을거라는 자신감과 또 그중에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심만큼 무지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런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영적 선택지는 ‘믿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 너머에 ‘우리가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실재한다고 믿고 그것을 사실로 여기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보이고 나타난 것에는 믿음이 필요없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실재를 대하는 원리이다. 


   고통의 문제를 담은 영원한 고전인 욥기를 잠시 떠올려보자. 상상하기에도 버거울 만큼 아픈 시간을 보낸 욥에게 드디어 하나님이라는 분이 나타났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고통과 악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최고의 책을 써 주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은 그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너는 누구냐? 네가 이 세상을 창조하였느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너는 어디 있었느냐? 내가 아침과 새벽의 위치를 정하고, 비와 이슬방울과 얼음과 서리와 깊은 바다의 아비가 되고, 하늘의 별자리들을 정확한 때에 일정한 방식으로 움직이게 하고, 하늘과 땅을 불변하는 규칙 안에서 움직이도록 할 때에,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리고 지금 네가 품고 있는 그 모든 지혜는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 하나님은 얇은 직선 속에서 불만을 품은 욥에게 그 직선을 위에서, 밖에서, 그리고 사방에서 품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음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셨다. 그제서야 욥은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인정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러나 혹자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증거가 어떻든 무조건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기독교적 의미에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증거와 상관없이 억지로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뜻이다.”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듯이 나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성을 버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내가 믿는 믿음이 그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또 만약 내가 믿는 믿음이 이성과는 절대로 동일선상에 설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억지로 무시해야만 지켜낼 수 있는 믿음이라면, 나도 그런 믿음은 다른 이들에게 권할 생각이 없다.


   이쯤에서 약간의 위로가 되는 말들을 조금 전해본다면, 물론 일반적인 사람들은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지만, 몇몇의 사람들은 신을 가리키는 자연에 대해 지적으로 집요하고 파고 들어가면서 믿음을 얻기도 한다. 주관성이 아닌 객관성을 통해 얻은 믿음이 실존했다는 것이다. 휴 시프켄(Hugh Siefken)이라는 물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 믿음을 요약하면 이런 역설이다. '나는 과학을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두 가지 모두 증명할 것이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이성의 목소리를 모두 외면한 채 그냥 '믿어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는 세상에 신을 설명할 만한 근거가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핑계를 댈 수가 없으며 (로마서 1:20) 또한 그 근거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을 찾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예레미아 29:13).


   회의(skepticism)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신앙인이 직면하는 회의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 이성적인 의문점으로부터 비롯된 지적인 회의가 있고,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침묵하는 신을 향한 실망에서 비롯된 회의도 있다. 또한 교회나 인간관계로부터 받은 상처가 뿌리가 되는 회의도 허다하며, 별다른 계기가 없는 신앙인들에게도 신에 대한 의문은 반드시 찾아온다. 물론 회의가 신앙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진정으로 더 큰 위협이 되는 것은 그 회의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신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한 의문점을 갖는 것을 신앙의 실패라 생각하고, 믿음의 부족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심을 내포하지 있지 않은 신앙은 항체를 갖추지 못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태평하게 열심히 사는 크리스천들은 너무 바쁘거나 무관심해서 믿음의 이유를 둘러싼 까다로운 질문들을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비극적인 일을 경험하거나 영리한 회의주의자들의 탐색적인 물음에 부닥치면 그제야 스스로 무방비 상태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런 신앙은 하룻밤 사이에도 무너질 수 있다.


   우리의 예측에서 벗어나는 기독교를 절대 외면해선 안된다. 이미 기독교는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종교다. 만일 기독교가 우리가 늘 예상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우주를 제시한다면, 우리는 기독교를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에 실재하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에는 우리의 예상과 맞지 않는 기묘한 비틀림이 있다. 때로는 그 비틀림이 우리에게 고뇌와 불확실함과 회의와 심지어는 절망으로 다가온다. 그 어두운 감정을 직면하고 싶지 않은 우리는 "하늘에 계신 선한 하나님이 계시니 만사형통"이라고 말하며 죄니 지옥이니 악마니 구속이니 하는 어렵고 무서운 교리들은 전부 제쳐놓고 싶은 기분이 들곤 하지만, 실재하는 것들은 절대로 그렇게 단순할 수 없다. 그러니 신앙의 대한 회의를 믿음이 없는 자들만이 겪는 하찮은 것이라고 규정하지 말자. 누구나 겪는 회의의 뿌리는 의심이며, 그 의심은 무지 속에서 불신이 된다. 그러나, 그 회의를 직면하고 대적할 때, 그것으로부터 시작된 탐구와 고뇌는 믿음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진다. 신은 지금도 우리를 그 광야로 초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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