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 가락시장에서의 위장 취업(?)은 그만두었다. 나를 고용해 줬던 사장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렸고 사장님께서는 의미 있는 일을 한다며 지원을 약속해 주셨다.
이제는 더 이상 밤을 새 과일을 옮기지 않아도 되지만 종종 가락시장에 들러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번째 프로덕트 개발이 끝나면 영업을 해야 했기에 인맥도 쌓을 겸 부단히도 돌아다녔던 것 같다.
그즈음 도매시장 사장님들이 쓰고 있는 한 소프트웨어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OO넷"이라는 이름의, 생전 처음 들어보는 수발주 프로그램이었다. 투박하지만 정확했고, 상인들이 현장에서 쓰기에 최적화된 프로그램이었다.
농산물 유통이란 분야가 진입 장벽이 있고 성공적인 안착이 어렵다 보니 경쟁사가 많지 않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분야가 겹치는 선배 스타트업들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꿰고 있었다. 하지만 시장에서 본 그 회사의 이름과 프로덕트는 1년이 넘은 시점에서도 한 번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한국 농산물(청과물) 유통 구조도
나는 바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고, 운영 중인 회사의 블로그와 몇몇 PR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회사의 창업자는 가락시장 수산동에서 25년을 일하신 중도매인이셨다. 25년이면 가락시장 내에서도 길게 일한 축에 속한다. 아주 오랜 기간 그 시장의 구성원이었고, 시장과 함께 인생을 살아온 분이었다.
어려운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이들이 모두 다 커 있더라고요. 밤새 일만 하느라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요....(중략) 저로 인해 시장의 상인들에게 삶의 여유를 주고 싶었습니다. 시스템을 바꿔보자! 현장에서 IT를 접목해 장부정리 업무가 빠르게 끝나게끔 바꿔보자! 생각했죠.
OO넷 대표님의 인터뷰 기사 중 일부 내용을 따와 각색한 내용이다. 시장 상인의 삶을 수십 년간 살아온 분이고, 나 역시 잠깐이나마 동고동락 했었기에 그 말이진실되고 꾸밈없음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해결하고자는 문제(Problem)는 우리와 다를 게 없었다. 팜도라 역시 상인들이 장부 정리에 소비하는 시간을 줄이고 좀 더 생산성 있게 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는 천지차이였다. 시장 곳곳에서 상인들은 OO넷 프로그램을 쓰고 있었고, 내가 여쭤볼 때마다 "이거 너무 좋다", "일이 편해졌다"라며 칭찬하셨다.
가락시장에서 수발주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모습 (출처 : 아시아타임즈 PR기사)
물론 OO넷은 스타트업 문법으로 바라 보자면 잘 나가는 프로덕트는 아니었다. 창업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매출 규모는 엄청 크지 않았고, 혁신의 숲이나 The VC 등 스타트업 정보 플랫폼에서는 털끝만큼도 관련 정보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락시장의 모든 사람들이 그 프로그램을 좋아했고 몇 번 두드려본 나도 '정말 쉽고 편하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OO넷이 마음만 먹는다면 한국 농산물 유통 생태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유통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물론 시간의 차이를 무시할 순 없으리라. 팜도라는 1년이 채 안되어 첫 제품을 피벗(Pivot)했고, 그 회사는 7년여간 꾸준히 같은 제품을 서비스 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이기에 중요한 논점은 아닐 것이다. OO넷은 어째서 7년 째 꾸준하게 할 수 있었고, 팜도라는 왜 1년 만에 포기해야 했는가.
OO넷 창업자님
나는 꽤 오랜 시간의 고민 끝에 스스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지었다.
왜(WHY)가 다르다
▶ 팜도라 : 온라인 도매시장을 만들어 농산물 유통의 혁신을 일으키자! → 도매시장의 거래 데이터가 필요해! → 종이 장부를 없애는 수발주 프로그램을 만들자!
▶ OO넷 : 나와 도매시장 상인들이 한 시간이라도 빨리 집에 갔으면 좋겠다 → 현재 일하는 장부 정리 시간을 줄이면 되겠다! → 종이 장부를 없애는 수발주 프로그램을 만들자!
나는 과일 유통업을 하시는 형님의 제안으로 팜도라를 창업했다. 농산물 유통 생태계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자료 조사를 해보니 잠재 기회가 보였다. 농산물 유통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었고 지금 올라타면 꽤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를 해결했을 때 창출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도 컸기에 명분도 있었다.
OO넷의 대표님은 도매시장의 중도매인으로 25년을 일했다. 수십 년을 새벽에 일하다 보니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 시장 안의 다른 상인들도 똑같이 힘든 삶을 살고 있다. 상인들을 위해 한 시간이라도 일찍 집에 갈 수 있도록 돕는 소프트웨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IT 회사를 창업했고 수발주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WHY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도 얘기하고, 사이먼 시넥(Simon Sinek)도 그렇게 얘기한다. WHY가 모든 것에 항상 우선해야 한다고.
사이먼 시넥이 말하는 Why로 시작하는 메세지 (이미지 출처 : https://www.depublik.com/)
사업은 지난한 싸움의 연속이다. 매일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강구하고 살아남을 돈을 마련해야 한다. 고객들을 충족시켜줘야 하며 구성원들과 비전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다.
사업을 하기 전에는 어려운 시기를 버티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돈(자금)'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1년 반 동안 팜도라를 운영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히게 되니 우선순위가 조금 바뀌었다.
나는 초기 창업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론 돈 역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지만) WHY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업을 하는 이유에 대한 확고함을 넘어,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진정성 있는 WHY만이 가장 괴롭고 힘든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버틸 기반이 되어주지 않을까.
스타트업을 하면 스트레스와 외로움으로 가득찬 시간이 끝없이 이어진다. 대표가 불안해하면 구성원들도 불안해하기에 감정을 티 내서도 안된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만큼 깜깜하지만 계속 길을 헤쳐나가야 하며, 중간중간 뒤돌아 길이 보인다며 팀원들에게도 얘기해줘야 한다. 불안과 희망 사이에서 길고 긴 시간을 버티기 위해선 WHY가 중요하다.
당시 농산물 유통업계에도 멋진 스타트업들이 꽤 있았다. 수천억 원 대의 가치를 평가받은 유니콘급 스타트업도 있었다. 모두 멋진 기업으로 훌륭한 창업자와 구성원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시장 내에서 탄탄하게 성장중인 OO넷만큼 진정성 있는 회사를 보지 못했다
이제 내 고민은 "해낼 수 있을까"에서 "왜 해야 할까"로 바뀌었다. 그렇게 한 두 달을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민이 풀리지 않던 그때 친한 친구로부터 마케팅 에이전시를 함께 하자는 제안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