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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우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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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Dec 12. 2024

분노가 우리를 잡아먹지 않게 하소서

-2024년 12월 12일(춥고 흐림)

"분노에는 세 가지 가치 있는 역할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분노는 억압당하는 사람 자신이 어떤 가해행위를 당하고 있는 지 깨우쳐주는 값진 신호입니다. 또한 분노는 그가 불의에 항거하고 저항하도록,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자신이 겪는 비탄의 속성을 전달하도록 하는 필수적 동기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분노는, 간단히 말해 그냥 정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끔찍한 잘못에 대한 격노는 옳은 것이게 분노는 진정성있는 무언가를 표현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지난 100년간의 역사에서 혁명적 정의를 추구했던 투쟁 중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성공을 거둔 투쟁은 비-분노에 대한 근본적 헌신을 통해 실행됐음을 알게 됩니다. 영국의 지배에 대항한 간디의 비타협적 투쟁이나 미국의 인종차별에 저항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시민권운동,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극복하고자했던 남아공 넬슨 만델라의 투쟁은 모두 대단한 성공을 거뒀지요. 그런데 이 세 가지 운동은 모두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분노를 거부했습니다.”


-마사 누스바움의 '분노와 용서' 중



'윤석열의 난'이 벌어진 12월 3일 후 우민은 자신의 분노가 정치적 공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쿠데타 가담세력을 조롱했고, 윤석열을 감싸고 돈 국힘당 의원들에게 '갑진백오적'이란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 윤석열과 그의 비상계엄령 조치를 지지한다는 화환이 잔뜩 놓인 것을 보고 살의를 느끼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 큰 반성을 하게 됐다.


그때 우민에게 떠오른 책이 마사 누스바움의 '분노와 용서'였다. 누스바움은 분노와 용서가 암묵적으로 상대의 굴복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영혼의 오염’을 가져온다고 매섭게 비판했다. 그러한 분노에 감염된 정의관은 과거지향적 인과응보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에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제도적 장치를 마려하는 미래지향적 정의 실현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인간의 3가지 영역인 친밀한 영역(가족과 연인, 친구), 중간 영역(직장과 일상), 정치적 영역(공공과 복리) 중에서 분노가 일정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영역뿐이라고 갈파했다. 친밀한 영역에선 분노가 아니라 슬픔으로 충분하며, 중간 영역에서도 분노보다 아량이나 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오직 정치적 영역에서만 분노의 표출이 의미있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누스바움은 강조한다. 불의와 불합리성을 보고  “말도 안 돼,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라며 공분하고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이때의 공분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정의 실현을 이성적으로 모색하게 만들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이행-분노(Transition-Anger)에 머물러야 한다. 복수심에 사로잡혀 이성적 판단을 가로막는 분노는 상대는 물론 자신도 파괴하는 독이 될 뿐이다.


누스바움은 이행-분노에서 출발해 가장 성공적 정의실현을 성취한 3가지 사례(간디, 킹, 만델라)를 관통하는 정신이 '비-분노(Non-Anger)'에 있다고 설명한다. 비-분노란 어떻게든 보복하겠다는 분노의 방종에도 빠지지 않으면서 가해자에게 나쁜 일이 벌어지기를 소망하는 것도 거부하면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고귀한 마음자세다.


 다행히 윤석열의 쿠데타 시도는 무산됐다. 그에 대한 공분은 이행-분노로 묶어두자. 그리고 권력자의 자의적 판단과 농단에 놀아나지 않게 더 안전하고 튼튼한 민주공화국을 만든는 데 지혜와 용기를 모으자. 당연히 거기엔 헌정질서의 변화도 포함돼야 하기에 더욱 지난한 과정이 될 수 있다. 이념과 정파로 반목과 분열을 거듭한 대한민국으로선 더 힘겨운 가시밭이 될 수도 있다. 과거사의 상흔과 트라우마로 인해 앙심과 적대감이 고개를 쳐들 때마다 주문처럼 외워보자. 비-분노의 지혜를 배우게 해달라고.




#우민은 '어리석은 백성(愚民)'이자 '근심하는 백성(憂民)'인 동시에 '또 하나의 백성(又民)'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제 자신에게 붙인 별호입니다. 우민일기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 '맨스플레인'에서 벗어나보자는 생각에 제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하려는 글쓰기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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