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즐거움을 주는 무언가가 중요했어요. 그리고 다시금 찾아야 했죠. 놓치지 않아야 했죠. 즐거움의 대상은 감각뿐 아니라 의미를 떠올리게 합니다. 해마 깊은 곳에 상징의 싹이 틉니다. 그것은 고착된 정서를 품고 있어요. 예를 들어볼까요.3살짜리 아기가 고구마 스틱을 찾아요. 고구마 스틱은 단순한 군것질거리가 아닙니다.
충동적으로 소리를 지를 때, 장난감을 집어 던지고 ‘뭐하는 거야 지금!’ 꾸중을 들을 때, 풀이 죽었을 때, 어린이집에서 맨 마지막에 나올 때, ‘하우아유!’를 처음 외쳤을 때, 한편의 위로와 보상일 거예요. 건강한 간식? 천만에요. 어른들의 생각이죠. 아기의 머릿속에는 지도가 만들어집니다. 호불호의 지도.
어느 순간 외롭거나 슬플 때, 아기는 고구마 스틱이 생각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순간의 정서가 떠오르는 거지요. 그 기억은 청소년기를 지나 불혹이 넘어서도 계속 남습니다. 돌아가고 싶어. 그때로. 책상 서랍 속에는 어느새 고구마 스틱이 가득 찹니다. 그럴 수 있죠. 충분히.
문제는 호불호의 '호'에서 오는 게 아니라 '불호'에서 생겨나요.
오이를 베어 물었을 때 입안에 물씬 풍기는 풋내. 낯설고, 이상합니다. 물을 마셔도 향이 남습니다. 이내 불쾌해집니다. 인간에게 편식은 본능입니다. 독이 든 풀을 먹지 않기 위해, 상한 고기를 삼키지 않기 위해, 일단 퉤퉤! 뱉는 거죠. 그 모습은 어른들이 보시기에 좋지 않습니다. 안 돼요. 편식하면 안 돼! 먹어봐. 좀 먹어! 자신의 의견이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 긍정적 기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지도가 아로새겨집니다. 부정적인 상황을 더 잘 기억하는 건 본능입니다. 생존에 유리하거든요. 취향은 상징입니다. 당시의 맥락이 만든 지독한 상징.
"오이는 정말 맛없어. 토할 것 같아.“
다시 풀이해볼까요.
”오이는 인정받지 못했던 순간의 상흔이야.“
아기는 더 악을 씁니다. 상징은 더욱 공고해집니다.그렇다고 언제까지 떼만 쓸 수는 없지요. 인간은 성장하는(해야만 하는) 동물입니다. 아무리 무섭더라도 반드시 해야 한다면(사회성) 변화하죠.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예를 들어 머리 감는 일) 것도 그 의미가 퇴색됩니다.
생각보다 문제가 없어요. 오히려 반대의 경우 머리가 가렵고 창피함이 생기는 등의 문제가 더 많아요. 다른 친구들은 모두 머리를 감아요. 자신만 감지 않아요. 사랑받지 못할 수도 있어요. 섬뜩해요. 공고했던 상징성에 균열을 냅니다. 부서집니다. 부서지고 보면 허망하죠. 내가 왜 이런 걸 무서워 했을까. 별 것 아니잖아.
성장이에요. 성장! 머리 감는 일은 상쾌한 거였어요!
성장이라……. 좋은 말이죠. 말은 쉽고 좋은데요. 왠지 설레는 말이기도 한데요. 성장통은 익숙해지질 않아요. 성장은 단단한 각오를 요합니다. 헙! 기합을 잔뜩 넣어도. 엄두가 나질 않아요. 그 좋은 성장이 말이죠. 그 고통의 과정을 볼까요.
아기는 샤워기가 머리에 닿는 순간 패닉 상태가 됩니다. 아무 소리도 들으려 하지 않아요. 눈을 감고 입으로 숨 쉬면 아무것도 아니란다. 부모의 말을 아기는 과연 못 알아 들었을까요. 방법은 중요하지 않아요. 아직 아기는 그 의미를, 감각을, 상징을, 부술 생각이 없어요.
눈이 얼마나 따가웠는데. 코로 물이 들어가면 가슴이 쿵 내려앉았는데. 아팠는데. 또 그럴 수 있는데. 아니야. 반드시 그럴 거야. 아기는 악을 써요. 악에 받친 거죠. 공포와 분노가 얼룩집니다. 고문받는 독립투사가 된 것처럼. 나쁜 순사가 된 것처럼. 아기도 부모도 기진맥진합니다. 아기는 ‘샤워기’에 점철된 부정적 상징을 부술 마음이 없습니다.
단순하게 무섭기만 한 게 아니라고. 괜찮다는 말이 싫은 거라고. 부모에 대한 원망과 지난한 인정투쟁. 우리는 그 과정을 얼마나 거쳤을까요. 금이 가서 벌어지고, 벌어진 자리를 메우고, 또 벌어지고, 메우고……, 무뎌지고 마비될 때까지. 사회적 억압에 굴복하는 거. 겨우 그딴 것 때문에……. 우린 고생하는 걸까요.
뭐 믿을 만해야 균열이 생기죠. 이렇게 아픈데.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참으면 복이 온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그런데 왜……. 낙이 없죠. 복이 없죠. 열매는 아직도 쓰죠.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 과열된 시대에서 도태하는 공포에 떠밀려 왜 우린 성장해야 하죠.
아기 때 느꼈던 공포는 넘겼으나, 가끔 머리 감는 게 귀찮고, 사실 귀찮은 것 이상의 불편함이 드는데, 성장한 스스로가 느껴야 하는 감정이 맞는 건가요? 산을 넘어 산을 타고, 강이 나타나면 헤엄쳤는데, 이 빌어먹을 성장은 교통사고처럼 불시에, 아프게, 끝이 없는 공중전으로 이끄는데 성장하면 행복한 것이 진정 맞는 건가요?
묻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확실하니? 아니오. 네가 느껴 봤니? 아니오. 안전하니? 몰라요. 행복하게 해주겠대? 그렇다는대요. 아이구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난 허락 못해. 반대야. 썩 나가. 초자아는 얼굴을 붉히고 성장을 노려봐요. 자아는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요. 쟤는 위험하지 않아요. 그냥 알려준대요. 무섭지 않다는 걸. 그게 다래요. 해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대요.
뭐 쉬워? 니가 그렇게 뒤통수 맞고 상처받은 세월이 쉬워? 잘못되면 어떡하려구. 또 후회하면. 또 실망하면. 또 괴로우면. 또 보상도 없고 인정도 없으면. 균열 그거 쉬운거 아니다. 니 멘탈도 깨지는 거야. 너 참을 수 있어? 그렇게 아파도 불안해도 참을 수 있어?
자아는 아무 말도 못해요. 불안해하는 것만 콕콕 짚었거든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성장하나요. 그리하여 얻는 건 무엇이고. 지금 작은 인정하나가 필요한데, 그거라도 있어야 하는데, 잘한다고 쓰다듬어주는 거 그거 하나면 되는데, 처음 물장구쳤던 순간, 처음 공차기, 처음 영어 인사, 첫 퍼즐 빈칸, 블록 높게 세우기, 그때는, 그때는 나를 웅장하게 해주던 모든 것이 있었는데, 왜, 이상한 욕심을 부려서 수영선수, 축구선수, 1등급 성적, 작가가 되려는 걸까요.
사실요. 자라기 싫어요. 햄만 먹었던 그때가 나았어요. 오이를 먹고 구역질을 하면 내게 오던 관심이 기억나요. 무섭다고요. 무서운 건 너무 확실하다구요. 떨고 있다구요. 예방주사는 맞기 싫다구요. 그때가 좋았어요. 역시는 항상 역시, 나였고 균열이 무서워요. 균열 사이에 새살 돋아 커지는 성장 따위. 아프잖아요 저는 아파요. 제발 알아주세요. 저는 아파요.
이런 떼를 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자 볼까요. 우리는 성장해야만 해요. 뒤쳐질 수 없어요. 도태는 즉 죽음이죠. 사회적 죽음. 존중이 없는 삶. 그렇게 살 수 없으니까. 감히 성장을 꿈꿔요. 요새 아이들, 성장을 꿈꾼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한 시도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요즘. 균열의 트라우마가 아물기도 전에 치받는 억압. 또 깨져야 하고, 떼를 쓰는 건 창피한 일이니까, 성장이라는 말보단 성공이라는 말이 더 안락하니까, 성공을 꿈꾸죠.
어쩐지 고구마 스틱이 당기는 날. 어쩐지 머리 감는 게 귀찮아지는 날. 어쩐지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날. 성장이 행복하게 만들어 줄지 잘 모르겠어요. 방해하는 누군가도 없던 그 아늑한 다락방에 가고 싶어요.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런데 이 모든 말들은 비밀입니다.
'불호'를 굳건하게 둘 거예요. 사랑했던 그때를 위해. 누군가가 머리를 쓰담아주면서 우아 잘 하네 우리 아기. 기억나요. 만족했던 순간이. 잊을 수 없는 게 죄인가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세요. 하지만 이 말도 비밀입니다.
나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을 거야. 나는 샤워기를 보면 악을 지를 거야. 군것질 아니면 안 먹을 거야. 그런데 아무도 몰라야 해.
그리고 그러면...그러고 나면 또 또 또 그래서 그리하여 그러므로 그런다면....이런 빌어처먹을....
나는 이제 어쩌면 좋죠?
묻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성장 나부랭이에 의연할 것. 때론 아무 시도도 하지 않을 것. 마치 안대 쓴 말처럼 굴 것. 주변의 기대는 부풀어가고. 주체성은 쭈그러들고. 꿈이라는 안전한 박스 안에서 꿈쩍할 것. 단지 꿈틀거릴 것. 에라이 씨, 발 없는 새처럼 굴 것. 준비할 페르소나는 많고, 진정한 자신을 까먹어도 코 막고 눈 딱, 감고 꿀꺽, 할 것. 쏠리는 것들은 다시 아래로 되새김질 할 것. 뭘 씹고 있는지도 모르겠는 걸 들키지 말 것. 워커홀릭, 성장홀릭 대환영, 이 더러운 세상에서 아름다운 성장의 아름다운 통과의례를 몰래 빙 돌아갈 것. 저항군 이미지는 필수. 가만히 저항하는 중인 건 쉿. 성장 드라마, 파노라마처럼 저장해둘 것. 나에겐 비장의 카드가 있지, 조커처럼 힐쭉일 것.
뭐 이런 모습,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성장의 환상 속에 가려진 성장통, 어쩔 수 없죠.
그런데요. 순서는 지켜야 할 것 같아요. 우리의 상징을, 그 속에 첩첩이 쌓인 정서들을 인정하고, 플라이 하이, 저 하늘 위로 성장합시다. 까치발 들고 날아오르는 인간 까치 되기 전에 말예요. 라떼는 말예요……. 안 그랬어요. 하고, 애들 잡지 말자구요. 나이테처럼 빼곡한 성장 트라우마 그거 다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요. 책가방이 가벼워졌다고, 스마트한 시대에 산다고 좋아진 거 하나 없잖아요. 굳이 ‘매슬로욕구단계설’ 들이밀지 않아도 우리 다 알잖아요. 3살 아기 때부터 차근차근 쌓인 응어리들이 많다는 거. 이 아사리판 밥상머리처럼 뒤엎지는 못해도 가까운 사람부터 그들이 쌓아 올린 정서의 상징을 인정하기로 해요. 스펙 쌓느라 스펙타클한 고통을 인내하며 픽픽 쓰러지는 우리들이 안쓰러워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무는 시간, 그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