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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상스 Jul 21. 2021

우리는 어느새, 감각이 어려워졌다



관념이 편해질수록 감각은 불편하다. 만약 감각으로 대신 소통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가식적이고 솔직하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럴 거면 차라리 말로 해! 진작에 말을 했으면 알았을 거 아니야.” 일부 맞는 말이다. 말은 정보이고 정보가 전달되면 우리는 사전적 의미로 머릿속에 저장된다. 그것을 정보 인지라 할 수 있지만, 과연 이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진정으로 이해 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백 마디의 말을 못 믿는 것이다. 우리는 관념어로 편안하게 대화한다. 허나, 관념의 약속, 언어가 소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10년지기 친구가 소주잔을 들고 초점이 흐린 눈빛으로 멀거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는 안다. 친구에게 좋지 않은 마음이 생겼다고. 우리는 안다. 친구의 10년의 서사를. 직장생활, 결혼생활, 특히 요즘에 어떤 고민이 있는지, 어떤 것이 심화되고 있는지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그 동작 하나를 감지하는 것으로 대번에 알 수 있다. 감각이란 얼마나 빠른가. 그를 캐치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은 0.01초 정도일 테다.

“무슨 일이야 표정이 좋지 않네. 또 싸웠냐?”

“아니, 별일 없어. 오늘따라 피곤해서 그래.” 

“이번에는 싸움 정도가 아닌가보네. 뭔 일인데 그래.”
 “아니 싸운 거 아니고, 그냥 좀,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긴 니 얼굴 꼴을 거울로 봐봐라 신경쓰여서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간다야.”

“아, 아무 일도 없다니까 그러네.”

“알았어어. 근데 왜 이게 나한테 신경질이여.”

“내가 언제, 언제! 언제 신경질 냈다고 그래!”


다음과 같은 상황을 장면으로 형상화 할 때,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친구는 썩어문들어지는 표정으로 아무 일 없다고 말했다. 아무 일 없다는 말을 우리는 믿을 수 있는가. 별일 없다고 받아드릴까. 친구의 방어적 태세에는 신경질이 잔뜩 묻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친구는 신경질을 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을 우리는 믿을 수 있는가.

대화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형편이 없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새삼스럽지만 굉장히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말을 믿지 않는다. 초 단위로 들어오는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이 운집된 감각의 흐름을 믿는다. 우리는 그것을 눈치라고 낮잡아 말한다. 낮잡혀야 할 건 눈치가 아니다. 바로 ‘말’이다. 

우리는 사실 ‘감각’으로 대화한다. 예술과 문학은 ‘형용할 수 없는 것들’ 감각으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우리는 말한다. “이게 도대체 뭐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관념!)’이 뭔데.” 눈치 없는 남자친구 같은 말을 한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린 언제부터 감각이 어려워졌을까. 느끼면 그뿐인데 왜 해석을 요할까. 정답을 딱! 하고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까. 정답: 알맞은 크기의 적당한 관념. 해답지를 안 보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오지선다 문항에 적당한 크기의 문장.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끝을 알아야겠어. 안다는 건 정보를 인지하는 것이므로 정보의 바다 인터넷을 검색한다. 도태가 두렵기 때문이다. 나만 모르는 것 같은 외로움. 분명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품인데 왜 나는 더럽게 재미없는가.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고 결말이 의미하는 바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관념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 고정관념, 통상적 상징 뒤에 숨으면 내가 스스로 나설 이유가 없을 테니까. 하여, 국어 문제를 풀 때는 가장 통상적인 정답을 찾으면 그뿐이었는데. 이 세세한 감각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감각으로 세상을 이해했다


우리가 언어라는 문신이 마음에 새겨지기 전이다. 우리는 남달리 감각기관이 뛰어났고 세상을 감으로 이해했다. 네발로 기어 다니면서 사각 냅킨을 마구 꺼내 이리저리 흩날려보고 까르르 웃다가, 리모컨 건전지 따위를 입에 넣어 맛보았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서 운 적도 있고 눈으로, 귀로, 코로, 입으로, 손으로, 세상을 더듬었다. 콰당, 넘어지면 엄마가 달려와 걱정 어린 눈으로 우리를 달래주었다. 감각의 지도는 취향으로 이어졌다. 의미와 관념 대신 감각과 정서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으며, 어른들은 우리에게 ‘순수’라는 이름 붙여주었다. 이제 우리는 당시의 어른들처럼 통념에 익숙해지고 관념이 편하며, 상징이 변하는 걸 불쾌해한다. 새로운 것들보다는 지키고 유지해야 할 것들이 중요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애초에 감각은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보고 듣고 만지면서 정서를 느끼면 된다. 아기처럼. 언어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정서를 숨기는 데 익숙하다. 배제당한 상태가 편하다. 둔감함은 실용적인 방패다. 간혹 예술작품에 혹할 때가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내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다.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빈 상자를 끌어안는다. 역시 박스가 제일이다. 생어(生語)보단 말린 어포가 제일이다. 고린내 풍기면서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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