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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상스 Jul 22. 2021

‘감각’은 사유 없이 느낄 수 없다

성장은 공포다 그러나...거북이의 시간은 반드시 온다

사회적 통념 속에도 감각은 있다. 그것을 우리는 현실적 감각이라 부른다. 통념과 가까워질 수 있는 눈치, 예를 들면 평소에 직장상사가 어떤 브랜드의 커피를 좋아하는지 눈여겨보기, 슬쩍 책상 위에 올려놓기, 누구보다 빠르게 수저를 깔아놓는다든지, 사회적 언어에 잘 반응한다든지, 청소 시간에 몰래 휴식 타임을 갖는 동기들 사이에서 군 간부가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 재빠르게 빗자루를 들고 움직이기, 길을 잘 찾는 것, 실용성에 밝은 것, 계산에 능한 것, 사회적 순발력, 주목받는 법을 캐치하기, 강한 서열을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차리는 것, 늘 다수에 속해 있지만 유일하게 혼자 이득을 남기는 법 체득하기, 등등. 현실적 감각이 뛰어나면 사회생활에서 얻는 것이 많다. 거대한 사회적 틀, 그중에서도 깊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능력.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답답해한다. 

야 너는 눈치를 밥 말아 먹었냐.

분위기 파악 좀 해라. 

너는 왜 그리 느리냐.

어렸을 적에 어른과 비슷한 행동을 잘할수록 우리는 칭찬을 들어왔다. 아이구, 우리 아기 다 컸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너 언제 클래. 아직도 애니? 이런 소리를 들어야 했다. 우리의 오감은 세상의 흐름에 집중했다. 그렇지 않고는 사랑받기도 살아남기도 힘들었다. 우리의 센스(감각)은 이런 식이다. 예쁜 것은 샤넬, 에르메스, 멋은 톰 브라운, 메종, 같은 것들이다. 어쩐지 람보르기니의 아름다움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이며, 신형 아반떼는 어쩐지 촌티가 좔좔 흐르는 것이다. 심지어 유행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미학적 감각을 변형할 수도 있다. 감각이 통념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감각할’ 수 없다. 사회적 관념이 대신 감각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 퍼즐조각이 된다. 그 사슬을 막는 것이 바로 ‘사유’다. 흘러가는 감각을 멈춰놓고 사유하지 않으면 우리는 관념의 취향 속에서 편안한 목마른 기린처럼 우아하게 뛰어다닐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감각을 사유하느라 멍때리고 앉아서 얻는 게 무엇인가. 없다. 미안하다. 사실 당장 얻는 것은 없다. 아, 앞으로도 얻지 못할수도 있다. 사회적 지위, 명예, 돈 같은 것과 크게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 그러나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 어떤 ‘현실’인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만약 감정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면, 단순히 ‘짜증’이나 ‘화’, ‘불쾌함’이 아니라면, ‘행복함’이 단순한 ‘행복’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괜히 마음만 복잡해질까. 머리만 아플 뿐인가. 그렇다면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복잡한 마음에 대한 통찰 때문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물 흐르듯이 흘러가서인가. 없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얼마 동안이나 편안해질까. 관념에 대한 탐구는 사회적으로부터 도피, 즉 편집증적 망상에 불과한 것인가. 불안을 잘 느끼면 그저 예민한 성격일 뿐일까. 우리는 왜, 그래서? 라는 질문보다 왜? 라는 질문이 더 불편한가. 심지어 무서워할까. 우리는 뭘 알고 싶지 않을 걸까. 

휴, 다행이다, 라고 느낀 적이 있다. 부족하다. 그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날, 나는 동네 슈퍼에서 맥주 두 캔과 과자 하나를 사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가 10층에서 멈췄다. 쿵, 하고 지면이 떨어졌다. 올라가는 중이었는데 말이다. 재빨리 비상벨을 눌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십여 초 동안 나는 생각보다 초연했다. 떨어질 수도 있겠구나. 세상에 이런 코미디 같은 죽음도 다 있구나. 그 코미디 같은 뉴스에 내가 나오겠다. 죽어서. 덜컹, 한 번, 덜컹, 두 번 지면이 떨어졌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빨리 뛰었는데 그때도 나는 숫자판만 보았다. 습관이란 게 무서운 법이다. 문이 열렸다. 지평선이 코앞에 있었다. 반은 암흑이며, 그 위는 10층 어딘가였다. 기묘했다. 자 봐봐. 이게 생과 사의 반쯤 어딘가야. 실감이 나니? 실감은 사실 한참 후에야 났다. 나는 숫자판을 보며 비상벨을 연타했고, 엘리베이터는 서서히 올라갔다. 땅이 내 발 높이쯤 왔을 때. 나는 잠시 주춤거렸다.(감각을 사유하는 데 있어 단점은 생존확률이 떨어진다는 것일 테다.) 천천히 땅을 내딛었다. 걸었다. 그때 나는 걷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으로 느꼈다. 아, 이게 걷는 거지.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는데 두근거리는 한편, 웃음이 났다. 살았다. 살아 있어. 순간적으로 모든 번뇌가 사라지면서, 살아 있는 게 장땡이라는 승리의 포효를 꾹 참았다. 공포와 희열이 뒤죽박죽이었는데. 그때 나는 무질의 소설 ‘지빠귀’에서 ‘포탄이 떨어지는 순간 살아 있는 것을 느꼈다’는 대목을 이해했다. 몸으로.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죽음을 직감했고 그 이후에 찾아온 ‘살아 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나는 생각했다. 아! 지평선 위에 있어서 몰랐던 감각. 아니, 사실 둔해졌던 감각. 검고 차가운 저 아래는 생각보다 가깝게 면해있었으며, 생과 사의 감각은 사실 떨어질 수가 없구나. 나는 어느 날 뜬금없이 찾아온 지평선에 한동안 빠져 살았다. 그리고 곧 그 감각은 얼마 안 가 둔해졌다. 


멍때리면 얻어지는 것

단점에 대한 예시가 너무 많아서 관념의 효용성을 빌리겠다. ‘사회성 부족’, 이라는 말로 대략 넘어가겠다. ‘감각이 예민하다’를 뭐라 할까. 남들은 한 대 맞았는데, 자기만 열 대 맞은 느낌이랄까. 이 무슨 억울한 기질인가. 감각의 무차별적 귀싸대기 찹찹찹 맞아본 사람은 안다. 아프니까 청춘이니까 후딱 넘어가서 내일의 태양을 향해 욕이나 날릴 겨를이 없다. 눈이라도 똑바로 뜨고 있으면 다행일 것이다. 정신이 없으니까. 감정은 감각의 운집. 그러니까 감각의 박스가 감정이라 한다면 날아드는 택배들을 피할 수 없으며. 정서는 마구 날뛴다. 그럴 때 팁. 멍이라도 때리자. 맞고만 살 수 없으니까. 저 어디 미국 갔다 오면 되는데 – 어머님 왈 – 그런데 굳이 왜 미국일까, 48번 은하는 왜 안 된대? - 단점은 얼빵하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주의력 결핍이나 산만하다는 소리, 느리다는 소리 들을 수 있다. 다만 그런 소리를 들을 때도 미국 갔다 오면 되는 방법이 있다.

이제 드디어 장점을 말할 차례다.

감각과 사유의 밸런스를 스스로 찾을 수 있다. 비로소 머리가 휴식할 수 있다. 마음도. 멍을 때린다고 하여 무념무상의 경지는 아니며, 뭔가를 사유하는데 그게 참 묘한 것이 많다. 공상, 망상 뭐 그렇게 시작을 하다가 이게 몰입되면 근거를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생각의 연속에서 뭔가 이상한 지점을 느끼는 것이다.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데 또 그게 아예 헛소리는 아니란 것이다.

어머, 얼빵이가 신기가 다 있네. 뭔가 육감적인 느낌적 느낌이라고 하는데, 확실히 동물적 감각과는 구분이 된다. 동물적이라면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이며, 길치가 아닐 것이며, 물건이 항상 마법처럼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기타 등등. 적어도 동물이라기보단 생물에 가깝지 않을까. 무튼, 워낙 넓은 범위를 감각하고 그걸 피해 사유로 들어가니 블랙홀처럼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서 느껴지는 건지, 상징세계의 벽 너머의 무언가를 슬쩍 느끼는데, 그게 때로는 상상력이 되거나 궤변이 되거나, 창의력이 되거나 창피함이 되거나, 뭐 그렇게 되는 것 같다.(자신 없음을 명백하고 당당하게 밝힌다.) 잘은 몰라도 현실에 대한 사유보다는 그 너머의 직관에서 창의력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역행


정설과 역설이 만나 펑, 하고 폭발한다. 이후에 싹트는 창의성.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새삼스러운 감각에 집중해본다. 경계선이 내려앉고 속삭이는 소리. 바깥, 바깥에서. 가위는 물건을 자르는 것. 물보라는 자를 수 없지. 이분법 논리 속에 갈라진 것들. 흑과 백. 명과 암. 천국과 지옥 사이에 눌어붙은 접속사들 싹뚝, 평행을 달리는 유니콘은 거짓말, 평등한 사회는 고질라 같은 소리, 강아지는 꼬리를 쫓아 뱅글뱅글, 우리는 인간이며 직립보행한다. 엉덩이는 없고 또한 정수리도 없지. 우리는 늘 앞만 봐. 우리는 늘 위만 봐. 우리는 높이 서 있다. 끝까지 올라가면 우리가 그렇게 찾아 헤맸던 항문을 볼 거야. 논리적으로 놀라는 척. 하지만 알지. 원래 극과 극은 같다는 거. 아이러니들이 불꽃놀이를 하고 있다. 그 화약 냄새, 고막은 멀쩡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새삼스러운 감각에 집중해본다. 항상 해답은 역방향에 있어. 우리는 갈등을 사랑해. 갈등이 없는 천국은 차라리 지옥이니까. 내 속의 문제아는, 즉 방어기제는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충성하지 않은 적이 없다. 우리가 느려지는 이유는 너와 나의 잘못이 아니야. 느려지게 두면 누구보다 빨라질 거야. 조급하게 굴수록 멍청해질 것이고, 이익을 따질수록 손해 볼 것이다. 기회비용은 이성적 어휘가 아니다. 기회비용은 상상의 영역이다. 상상할수록 손해는 커진다. 땅, 주식, 차, 집, 영화 티켓, 한 권의 책, 한 잔의 커피…… 상상할수록 무한하다. 손해공포 그거, 내려놓자. 우리는 경주마처럼 경쟁 속에 떠밀려 있고 지름길의 유혹을 참지 못한다. 지름길은 도돌이표. 가봐서 알잖아. 언제나 꽝이라는 거. 내일이 온다. 성장해야 한다. 빨라지는 숨소리. 편도체는 적색경보를 내리고 방어기제 출동. 경보음은 꺼지질 않고. 작심 1일. 작심 3일이 대단해 보이는 우리는 작심 1일. 성장은 공포다. 차근차근 축적해온 PTSD. 억, 소리 나게 부러질 것이오. 그 조각들은 다시 붙어 커질 것이다. 성취감, 그 찰나의 기쁨은 인생 최고의 기쁨이다. 우리는 충분히 그 경험을 누린 적이 없고. 그 전에 해야 할 것들이 많다. 사랑받기. 존중받기. 신뢰받기. 부러지고 깨질 때 달려오는 의료진들 준비하기. 그 무엇보다 내가 나를 인정해 주기. 우리는 성장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남들은 일취월장인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쥐털만큼의 성장이 아니라, 성장 준비라니. 

가만히 눈을 감고 새삼스러운 숨소리에 집중해본다. 각자의 시간과 각각의 세상이 있다는 걸 모르는 그런 사람들에게 흔들릴 필요가 없다. 그들은 세상을 2차원으로 보고 있기에 얻을 것도 줄 것도 없다. 넓은 범위를 감각하자. 그리고 사유하자. 천천히 아프지 않게 반복하자. 토끼와 거북이는 동화가 아니다. 하이퍼 리얼리즘이지. 거북이의 시간은 반드시 온다. 그러니까, 점점 느리게, 점점 느리게, 점점 느, 리,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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